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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민주항쟁 30년③]“저승 가서 할 말이…” 누명쓰고 분신한 김수배
아내 “죽기 전 사진찍자는걸 마다한게 평생 한”

[헤럴드경제=김진원 기자]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잊혀진 열사들이 있다.

1987년 1월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며 쓰러 사망했다”고 박종철 열사의 고문 사실을 숨겼다.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같은해 6월 10일 국민평화대행진을 하루 앞두고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불씨가 커졌다. 박종철ㆍ이한열 열사는 이후 6월 항쟁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러나 6월 항쟁에 스러져 간 이들은 더 많다. 잊혀졌을 뿐이다.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이들을 조명해봤다.

[사진=김수배 열사 아들이 만든 추모 동영상 캡처.]

1987년, 민정당 노태우 대표의 6ㆍ29 선언으로 정점을 찍은 민주화 열기는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옮겨 붙었다. 중공업, 조선, 석유화학 사업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결성이 뒤를 이었다. 경공업 여성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이 중공업 남성노동자층으로 번져갔다.

6월 항쟁까지는 ‘반군부’의 목소리를 내던 언론들도 노동자 대투쟁과는 선을 그었다. 정치권 역시 회사와 노조에 분규 해결을 맡기며 노동자 측의 자제를 촉구했다. 회사들은 관리ㆍ사무직을 중심으로 한 구사대를 동원해 노조 탄압에 나섰다.

김수배 열사가 몸담았던 회사 역시 노조 설립에 나섰다. 경남공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한 김수배 열사는 86년 사무직으로 K화학에 입사했다. 초기에는 직종 구분없이 모든 노동자가 가입했다. 사측의 협박에 밀려 하나 둘 탈퇴했다. 노조 사무장을 맡은 김 씨는 끝까지 책임을 지려했다.

김수배 열사 아내 김현숙(57) 씨는 “그때 민주화 바람이 거셌습니다. 남편은 운동권이 아니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도와달라고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노조 활동을 하는 것도 전혀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수배 열사는 회사 간부와 수차례 면담을 하며 관리 대상으로 분류됐다. 노조 조합비 징수과정에서 서명을 하나씩 받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사무장이 일괄 대리 서명한 것이 울산경찰서에 사문서 위조로 고발당했다. 당시 관행으로 여겨졌기에 노조 탄압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해 10월 16일 오전 소환장이 발부됐다. 김수배 열사는 노조탄압에 항거하고 개인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한 ‘분신’을 택했다. 돌을 앞둔 아들을 남겼다.

김수배 열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꼽은 87년 민주화운동 사망자 9명 중 한 명이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김수배 열사는 아직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유가족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 접수 기한을 모르고 지나갔다. 이명박ㆍ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며 민보상 활동이 미비해진 것도 영향이 있었다.

김 씨는 이제라도 남편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길 바란다며 말했다.

“남편이 죽기 전에 사진을 찍자고 계속 말을 했어요. 그때 제가 보름 있으면 아들 돌 잔치 하는데 무슨 사진을 찍냐고 한게 너무 가슴 아픕니다. 민주화 관련자라도 인정되면 저승 가서 제가 뭐라도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jin1@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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