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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악의 설 명절] 불황한파ㆍ고물가ㆍ고용절벽…苦씨네 가족의 암울한 설
[헤럴드경제=유재훈 기자] ‘설은 질어야 좋고, 추석은 밝아야 좋다’

우리 조상들은 겨울 설 즈음이 되면 눈이 많이 오길 기대했다. 눈이 땅을 덮어 이불 구실을 해 농작물이 어는 것을 막고, 수분 공급이 충분해져 농사가 잘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설을 닷새 앞둔 오늘의 우리 경제는 조상들이 기다렸던 ‘서설(瑞雪)’이 아닌 경제위기 ‘눈사태’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지경이다.

서민경제는 더 심각하다. 설 명절 기분을 내기는커녕 당장을 가계 살림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여기 가상의 한 가정을 통해 최악의 설 명절 경기를 짚어본다.



▶ 최악의 경기…가장의 한숨=‘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인 1960년생, 57세의 고(苦)경기 씨. 설 명절 연휴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고 씨의 마음은 무겁기만하다. 30년간 일해온 직장에서 퇴직을 권고해왔기 때문. 정년까지 아직 3년 넘게 남았고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면 그 이상도 일할 수 있지만, 중소 기계 부품업체인 고 씨의 직장은 최악의 경기에 당장 회사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다. 조선ㆍ중공업 등 제조업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문제는 올해 사정도 별반 나아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연말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 대상으로 조사한 올 1월 종합경기 전망치는 89.9를 기록해 8개월 연속 기준치 100을 하회했다. 2012년 유로존 위기 당시 9개월 연속 100을 넘어서지 못한 이후 최장 기록이다.

대기업이 기침을 하면 중소기업은 몸살을 앓듯 고 씨의 직장 같은 중소기업은 더 심각하다. 중소기업중앙회의 ‘2017년 중소기업 경기전망 및 경제환경 조사’에 따르면 올해 경기가 지난해 수준 혹은 더 나빠질 것이라고 응답한 기업이 각각 48.2%와 39.6%로 집계됐다. 올해 경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중소기업이 10곳 중 9곳에 달한다는 뜻이다.

고 씨는 회사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직 제2의 인생을 살 준비도 되지 않았다. 퇴직금으로 장사나 해볼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봤지만, 치킨집, 편의점으로 평생 모은 노후자금을 몇 년새 날리는 지인들을 숱하게 봐온 터다.

통계청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지난 4분기 직원을 고용하지 않은 ‘나홀로’ 자영업자의 수는 403만7000명으로 전년대비 10만명 가까이 늘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고용원을 두지 않는 생계형 창업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창업이 곧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2015년 기준 부가가치세를 처음으로 신고한 개인사업자는 106만8000명, 폐업한 개인 사업자는 73만9000명으로 나타났다. 한해 살아남은 자영업자가 3명 중 1명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고 씨에게 이번 설은 이래저래 무겁기만 하다. 



▶ 장보기가 겁나는 가정주부=고 씨의 아내이자 맏며느리인 박부진 씨는 이번 설 명절동안 가계부와 씨름을 하게 생겼다. 남편인 고 씨가 맏형인 탓에 차례상은 물론 집으로 모이는 작은집 식구들이 먹을 음식까지 준비해야 한다.

당장 전을 부쳐야 하는데 계란 값이 망설여진다. 미국에서 수입돼온 계란이 시중에 풀리며 그나마 값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1만원 가까운 계란값은 부담이 된다.

장바구니 물가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박 씨다. 신문을 보니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최근 전국 45개 전통시장과 대형유통업체를 대상으로 올해 설 차례상 구입 비용을 조사한 결과, 전통시장은 25만3000원, 대형유통업체는 34만원 선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수치상으론 지난해보다 각각 4.9%, 0.7% 상승했다는데, 박 씨의 지갑에서 나가는 돈은 그 몇 배가 되는 기분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생산자물가지수를 봐도 그렇다. 지난 12월 지수는 100.79로 전달보다 0.8% 상승했다. 지난 여름 폭염에서부터 이어진 물가지수는 17개월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배추, 무 등은 두배 넘게 뛰었다. 생산자물가가 소비자물가에 반영되는 데는 일정 시간이 걸리는 만큼 설 명절 기간은 당분간 농수산물 가격이 널뛰기할 가능성이 크다.

가뜩이나 남편 고 씨가 곧 회사에서 퇴직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형편이다.

그렇다고 먹고 입는 것을 줄일 수도 없으니 박 씨의 고민은 답이 없다. 



▶ ‘졸업이 곧 실업자’ 아들도 괴롭다=고 씨의 아들 고청년 씨. 다음달 대학 졸업식을 앞둔 청년 씨는 이번 설 명절 연휴를 어디서 어떻게 보낼 지가 고민이다. 집으로 몰려들 친지들에게 취업을 묻는 ‘고문’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실업자가 450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취업준비생, 쉬었음, 고시학원ㆍ직업훈련기관 등 학원 통학생, 주 18시간 미만 취업자 등을 모두 합한 숫자다. 통계청에선 여러 지표를 임의적으로 혼합해 유의성이 떨어지는 지표라고 하지만, 번듯한 직장에 취업한 친구들이 손에 꼽을 정도인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졸업을 앞둔 청년 씨도 곧 ‘사실상 실업자’에 포함될 날이 머지 않았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자니,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 지난해 5~9급 공무원 응시인원은 총 70만6000여명. 국가직 7급 공무원 공채시험 경쟁률은 76.1대1, 국가직 9급 경쟁률은 53.8대1이었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지난한 길이다.

사기업 취업도 만만치 않다. 바늘귀 뚫기만큼이나 힘든 대기업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탄핵정국 속에 ‘최순실 게이트’의 여파가 재계로 전이되며 기업들은 상반기 채용 계획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괜찮다는 기업들도 경기 위축에 채용 인원을 줄이는 추세다. 지난 연말 고용부의 발표에 따르면 올 1분기 300인 이상 사업체의 채용 계획이 9% 가까이 감소했다고 한다. 상용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는 지난 4분기부터 올 1분기까지 30만4000명의 채용을 계획중이다. 하지만 그 중 양질의 일자리로 평가되는 300인 이상 사업체의 비중은 10%도 안된다. 정부에선 모든 부처에 ‘일자리 국장’을 두고 상반기에 공공부문 채용을 집중하겠다고 하지만 곧 취업시장으로 쏟아질 대학 졸업생들에겐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청년 씨는 당장 이번 연휴 기간동안 친구들과 아르바이트를 해볼까 한다. ‘가시방석’인 집에 있느니 용돈이라도 벌어보겠다는 심산이다. 한 취업포털사이트의 설문에 따르면 대학생 1478명 중 ‘연휴기간 귀향대신 알바를 하겠다’는 응답자가 77.5%에 달했다고 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청년 씨는 씁쓸한 안도감이 들었다.

igiza7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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