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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의 영화X정치]정치에서의 거짓말, 공화국의 위기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국민들의 더 많은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일까. 새해가 됐지만 여전히 진실은 쉽지 않다.

새해가 되자 마자 박근혜 대통령은 “나를 완전히 엮은 것”이라고 했다. ‘직무정지’ 중 청와대에서 기자들을 불러 한 말이다. 지난 5일 법정에 선 최순실씨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억울한 부분이 많다”고 했다. 같은날 박 대통령 법률대리인들은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도 사형선고를 받고 예수도 십자가를 졌다”고 했다. 탄핵 중인 박 대통령을 그렇게 비유했다. 1000만 촛불에 대해서는 민심이 아니라고 했고, 김일성 주체사상을 따르는 이들이 주도한 것이라고도 했다. 김기춘, 우병우, 안종범, 김종, 윤전추, 조해옥, 정호성, 이재만, 안봉근 등 최순실 국정농단 관련한 거의 모든 ‘증인’이나 ‘피의자’들이 한결같이 부인과 ‘모르쇠’, 또는 잠적이나 불출석 등으로 일관하고 있다. 


▶박근혜,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지켜보며 두 가지 의문이 든다. 먼저 어떻게 그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다. 거짓말이 이뤄지는 방대하고 조직적이며 집단적인 규모가 놀랍다. 두번째 질문은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가?”라는 것이다. 첫번째 질문이 ‘거짓말’에 대한 것이라면 두번째 의문은 ‘행위’에 관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 범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재판과 특검수사, 헌법재판소에 올라간 행위들 말이다.

거짓말과 행위는 상호 연관적이다. 현재까지 제기된 모든 증거 및 증언, 수사 결과들을 감안하면 문화융성에서 창조경제까지 박근혜 정부에서 이뤄졌던 거의 모든 정책이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 국민들을 상대로 한 ‘사기극’일 가능성이 높다. 최순실씨와 청와대 비서진 등의 머리에서 기획되고, 국민 세금과 대기업으로부터 재원이 조달되며, 교수ㆍ연구원 등 전문가들에 의해 ‘보증’되며, 각 정부 부처에 의해 홍보되고 시행되는 대규모 조작극의 형태다. 

▶거짓말과 행위, 이라크전의 경우

이 정도 규모의 ‘거짓’에 기초한 국가 파괴적 행위는 미국이 수행했던 ‘이라크전’을 들 수 있다. 그 실체는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그린 존’에 잘 그려졌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 제거 및 제조시설 파괴 임무를 띠고 이라크전에 투입된 한육군 장교의 이야기다. 정부가 ‘치밀한’ 첩보전에 의해 획득한 정보대로 주인공은 대량살상무기 제조시설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대량살상무기가 아니었다. 전쟁의 진실이었다. 


실제로 지난 2002년 9월 8일, 뉴욕타임스는 익명의 국방부 관계자의 ‘증언’을 근거로 이라크가 핵미사일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의혹을 1면 톱기사로 전했다. 이날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과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 그리고 럼스펠트 국방장관이 신문을 들고 연이어 TV 카메라 앞에 서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리고 1년 후인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리고 전쟁 개시 2년 후인 2005년, 뉴욕타임스는 이라크 대량학살 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한 일련의 기사가 근거 없는 오보였다고 해명하는 보도를 실었다. 이른바 주디스 밀러 오보 사건이었다. 


이라크전 개시에서 ‘거짓된 정보’는 국방부로부터 나와 언론에 공표되고 다시 정부 판단의 기초가 됐다. 과연 미국 정부는 어떻게 ‘거짓 정보’를 믿고, ‘거짓말’을 하고,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하게 됐을까? 전쟁 수행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집단이나 기업, 개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지만, 이것을 단지 인간의 ‘비양심’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 온갖 정보와 고위관료, 전문가,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정부가 수행한 일이라고 보기엔 너무 어처구니없는 정보를 기초로 했다. 더구나 이 전쟁으로 많은 미국 병사와 이라크인들이 인명ㆍ재산상의 손해를 입었다. 그런의미라면 대한민국 최고 권력과 최고 정치ㆍ경제ㆍ문화ㆍ과학 엘리트집단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비교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의 베트남전이 그랬다. 결국 미국 닉슨 대통령의 탄핵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국가의 거짓말: 베트남전 통킹만 사건의 경우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유명한 대사 중 하나는 “예술가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을 사용하지만, 정치인은 진실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경험적으로는 맞을 가능성이 많은 말이다.

문제는 정치인들이 하는 거짓말의 수준이다. 정략을 위해 약속을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떼는 일이야 예외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정치인들에겐 일반화돼 있는 거짓말이다. 막말과 불법, 범죄를 저질러 사익을 챙기고도 부인하는 사기나 잡범 수준의 거짓도 드물지는 않다.

문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준의 ‘방대하고 조직적인 규모로 행해진 거짓말’이다. 이것은 정치인 개인의 거짓말 수준이 아니라 정부의 거짓말이고 국가권력이 행하는 거짓말이다.

현대사에서 국가권력 수준의 거짓말을 전면적으로 폭로한 거의 최초의 사례가 바로 ‘펜타곤 문서’(펜타곤 페이퍼)다. 각국 정부의 비밀 문서를 폭로하는 ‘위키리크스’의 전범으로 꼽히기도 한다.

‘펜타곤 문서’의 공식명칭은 ‘1945~67년 미ㆍ베트남 관계: 국방부 연구문서’이다. 이 문서는 미 국방부 1급 기밀이었으나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 최초 공개되면서 미국을 뒤흔들었다. 이로 인해 반전 운동이 더욱 확산됐고 ‘워터게이트’와 함께 닉슨 대통령이 하야하는 계기가 됐다.

이 문서는 1967년 당시 미 국방부장관 로버트 S.맥나마라가 작성을 지시한 것으로 해당기간 동안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관한 ‘백과사전적인’ 자료들을 망라했다. 문제가 된 것은 미국정부가 전적으로 잘못된 정보나 목표, 거짓 선전에 의해 베트남전을 개시하고 확대했다는 의혹을 이 자료가 전면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을 줬던 것은 통킹 만 사건의 실체다. 통킹 만 사건은 1964년 8월 2일 베트남 통킹 만에서 북베트남 초계정으로부터 미국의군함이 어뢰공격을 받았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이를 빌미로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했고, 베트남전이 본격화했다. 그러나 ‘펜타곤 문서’는 이것이 미국 정부에 의해 조작됐음을 폭로했다.

▶정치에서의 거짓말, 공화국의 위기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공화국의 위기’에 실린 논문 ‘정치에서의 거짓말’에서, ‘펜타곤 문서’를 통해 국가적 수준의 ‘거짓말’에 대해 분석한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다. 어떻게 국가적 수준의 거짓말이 가능한가라는 것과 “그들(국가통치자, 관료, 전문가집단)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라는 대한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는 ‘펜타곤 문서’를 뉴욕타임스에 전한 대니얼 엘즈버그의 말이다. 대니얼 엘즈버그는 경제학자 출신으로 ‘펜타곤 문서’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했으나 이후 반전 운동에 자극받아 국가 기밀을 폭로한 인물이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에서의 거짓말’에선 마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지목하는 것같은 구절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자면 “정부의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정치적으로 몹시 진실하지 않게 행동했고, 거짓말하는 행태가 정부부처와 군, 민간 등 모든 계층에까지 엄청날 정도로 만연되었기 때문”같은 대목들이 그렇다. 결국 이 논문은 이라크전과 베트남전,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같은 국가적 수준의 ‘거짓말’에는 모종의 공통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지 특정 개인들의 왜곡된 성격이나 범죄적 특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며, 전면화됐을 때 공화국의 기반 자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속이는 자의 자기 기만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국가적 수준의 거짓말이란 인간의 범죄적 특성에 의해 우연히 정치로 흘러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탱하는 사실의 망 자체가 거짓에 취약하다. 거짓말을 종종 현실보다 더 그럴 듯하며 이성에 더 호소력을 갖는다. 왜냐하면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거짓말을 듣게 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이나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사전에 알고 있다는 큰 강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통치 대상들이 원하는 바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거짓을 더욱 능통하게 할 수 있는 최신의 방법들도 있다. 바로 정부 홍보담당관과 ‘문제해결사’라 불리는 전문가들이다. 홍보담당관은 정치를 ‘홍보’화 하며, 대중들이 믿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대학과 싱크탱크 등에서 동원된 ‘문제해결사’들은 홍보담당관들이 창조한 환상에 ‘합리적 이론과 증거’들을 제시한다. 한나 아렌트는 ‘문제 해결사’들이 일관된 ‘이론’을 위해 때로는 그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의 제거와 조작까지 시도한다. ‘역사의 왜곡’이 대표적인 경우다.

한나 아렌트는 펜타곤 문서를 통해 미국의 베트남전의 목표가 권력도 이익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세계 최강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전장에서의 승리가 목적이 아니었고, ‘사람의 마음’ 속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전 지구적 정책으로서의 이미지 만들기-세계정복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사실상 역사에 기록된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를 보관하는 거대한 창고에 들어온 새로운 품목이다”라고 했다.

한나 아렌트는 “기만자들은 자기기만으로 시작했다. 아마도 높은 지위와 그들의 놀랄 만한 자기 확신감 때문에 그들은 전장에서가 아니라 홍보 영역에서의 압도적인 성공을 너무나 확신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조작의 무한한 가능성에 관한 심리학적 전제들의 타당성을 너무나 확신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전쟁에 대해 전반적인 신념을 가졌고 승리를 예측했다.”고도 했다.

한나 아렌트는 거짓말쟁이가 결국 자기의 거짓말을 믿게 되는 자기기만의 과정과, 국가 이미지를 목표로 한 통치ㆍ홍보ㆍ전문가 집단의 현실 괴리 등을 분석한다.

결국, 국가적 수준에서 이뤄지는 거짓 혹은 거짓에 기초한 행위란 대중들을 속이기 위해 창조한 국가 이미지라는 ‘환상’과, 그 환상에 스스로도 빠져버리는 자기기만, 이에 대한 전문가ㆍ엘리트 집단의 ‘합리화’로 이뤄진다. 이렇지 않고서야 적어도 4년전부터 시작돼 지금도 계속되는 이 거대하고 수많은 거짓말들을 이해할 방법이란 없을 지도 모른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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