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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틀린 영조 가족사, 화협옹주는 순수했다…최근 원래 묘 확인
[헤럴드경제=함영훈기자] 영조와 노론 간 오랜 정치적 신경전과 상처 뿐인 대타협은 영조 일가의 가족 관계를 어지럽혀 놓았다.

노론의 정치적 카드였던 ‘영조세력에 의한 선왕 경종 독살설’이 끊임없이 영조를 괴롭혔고, 결국 노론의 이간질 속에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 간 부자(父子) 관계가 뒤틀렸다.

노론의 딸 혜경궁 홍씨는 남편(사도세자)의 피살을 방관한 ‘냉혹한 여인’이라는 일부 비판을 받지만, 당시 정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그녀로서는 억울하다 할 수 있다.


화협옹주가 처음 묻힌 곳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43-19 일대에서 발굴된 부장 유물

화협옹주가 처음 묻힌 곳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43-19 일대에서 발굴된 부장 유물

아들(정조)을 지키려 남편 죽음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았는데, 정작 정조는 요절한 큰아버지(효장세자:사도세자의 형) 후사 자격으로 세손(할아버지의 왕위를 잇는 손자)이 되어야 한다는 영조의 명령이 내려진다. 혜경궁 홍씨의 아들이 아니라는 청천벽력 같은 영조의 명에 “내가 이러려고 사가에 내쳐져 숨죽이며 지냈나”하는 아픔을 토해낸다.

한중록에서 홍씨는 ‘위에서 하시는 일을 아랫사람이 감히 이렇다 하겠나 마는 그때 내 심정은 망극할 따름이었다. 내가 임오년 화변(1762년, 사도세자 죽음) 때 모진 목숨을 결단치 못하고 살아 있다가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라고 기록한다.

홍씨는 한중록에서 영조가 냉혹한 사람이라는 점을 자주 거론한다. 정치적으로 남편이 살해된 것이 아니라, 영조가 근본적으로 자식에 대한 정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는 친정아버지가 속한 거대권력 노론의 눈치를 본 문체가 아니었겠느냐는 해석을 낳는다.

그는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친누나인 화협옹주에 대해 이렇게 썼다. ‘화협옹주가 영조에게 미움을 받아서 영조가 나쁜 말을 들으면 귀를 씻고 그 물을 화협옹주의 처소에 부을 정도’라고.

사실은 달랐다. 홍씨가 ‘노론의 딸’이라는 멍에 때문에 ‘냉혈한’이라는 오해를 받아가며 울분을 참았듯, 영조가 노론세력의 압박때문에 ‘인정머리 없는 가장’으로 비쳐진 것이지, 실제론 딸 사랑이 애틋했다.

옹주가 위독하다는 말에 사가인 옹주집을 찾아가 딸의 머리맡에서 밤을 샜고, 딸의 병환에 대해 늑장 보고한 신하들을 처벌했던 영조였다.

절세미인으로 알려진 화협옹주는 사실, 10세때 세자빈이 돼 입궐한 혜경궁홍씨가 궐 생활을 적응하는데 도와준 인물이다. 순수한 사람이었다고 실록 등은 전한다.

뒤틀어진 영조 일가 식구 개개인의 속마음은 화협옹주의 20년 짧은 인생 속에서 어느정도 가늠할수 있다. 모두 인정머리 없는 집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조는 영조대로, 홍씨는 홍씨대로 위기 극복의 지혜를 짜내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을 뿐. 착한 화협옹주는 젊은 날 숨지면서 가족 화합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화협옹주가 처음 묻힌 곳이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43-19 일대였음이 최근 확인됐다. 문화재청, 남양주시, 재단법인 고려문화재연구원은 최근 이곳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영조가 손수 적은 ‘유명조선화협옹주인좌(有名朝鮮和協翁主寅坐)’라는 글과 화장품이 채워진 청화백자합, 분채, 나무로 만든 목마 등을 발굴했다.

영조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일부 속설을 깬 유물들이다. 영조는 화협옹주를 보고 싶어 수시로 그녀의 사가를 방문했다는 실록의 기록도 재조명된다. 사망원인은 홍역이었다.

최근 발굴조사에서는 화협옹주의 장지라는 것을 증명하는 묘지(墓誌)와 지석(誌石), 청화백자합 10점, 분채(粉彩) 1점, 목제합 3점, 청동거울과 거울집, 목제 빗과 직물류가 수습됐다.

혜경궁 홍씨 역시 냉혈한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어릴적 목격하고 불타는 적개심을 가졌을 정조는 남편 죽음을 방관했다는 몇몇 사람들의 얘기를 알고도 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것으로 알려진다. 임오년 당시 어린 세자빈이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들(정조) 지키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고, 가족사의 숱한 ‘치명상’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채 ‘한중록’ 등을 통해 얼버무리고 봉합하려 했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정조는 모친이 부스럼으로 고통받자 손수 밤새 손이 퉁퉁 부을 때까지 약을 발라주었고 이런 효성에 씻은 듯이 낫기도 했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죽은지 33년이 지난 1795년. 혜경궁 홍씨가 환갑이 되던 그 해,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수원으로 행차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앙금이 풀리고, 정조 자신의 신분이 ‘한 가족’으로 복원되는 순간이었다. 착하고 이쁜 화협옹주의 영령도 이날을 기뻐했을 것이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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