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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최루탄에 울던 서울의 그 길, 그 선술집
기습 거리시위 단골장소 신림사거리·봉천사거리
신군부 폭정 안주삼아 타는 목마름으로 술마시던 곳
‘미싱공’과 대학생들이 연대한 동대문~광희문 주변




현대사에서 서울의 길은 사랑에 웃고 최루탄에 울게 했다.

군사 정권이 지배하던 1980년대, 서울 관악구 서울대 학생들이 서식ㆍ출몰하는 곳 중에는 ‘신사리’와 ‘봉사리’가 있었다. 사랑이 영글고, 경찰에 쫓기던 골목길이 있는 곳이다.

서울대 문리대가 도심인 동숭동-혜화동(대학로)에 있던 유신시절, 인근 성균관대와 합세해 정권 반대 시위를 하도 많이 벌이니, 박정희 정권이 관악산 버들골이라는 오지로 쫓아냈다.
경복궁역 인근 통인시장 골목길.

서울대로 가는 길은 신림동, 봉천동(서울대입구역), 낙성대에서 출발하는 세 갈래이다. 신사리는 신림사거리, 봉사리는 봉천사거리의 줄임말이다. 신군부 반대를 외치던 학생들은 아크로폴리스 집회 후 대운동장 앞에서 세를 결집한 뒤 어깨동무를 하고 훌라송을 부르며 교문 돌파를 감행한다. 신림천변을 따라 신사리쪽으로 향하다 강제해산 당하면 녹두거리에서 순대와 파전, 짬뽕국물로 군부 치하의 한을 달랬다.

▶봉사리ㆍ신사리=봉사리는 기습 거리시위의 단골 장소였다. 최루탄 공세에 밀려 대열이 흩어지고, 경찰이 추격해와도 신림동쪽, 낙성대쪽, 봉천동 달동네쪽 사방에 도망할 곳이 많았다. 신림동 신원시장에서 부터 행운동 먹자골목까지 선술집도 즐비했다. 시위를 마치면 전두환 신군부의 폭정을 안주 삼아 타는 목마름으로 술을 마시고, 허벅지가 터지도록 손바닥 장단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신림ㆍ봉천동에는 맛집들이 많아 과거 이 거리를 배회하던 사람들 뿐 만 아니라 많은 등산객ㆍ식도락가들이 찾는다. 고려 강감찬 장군이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질 때 태어났다는 낙성대,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 앵베르 주교 등 유해가 모셔져있는 삼성산 성지, 신림동 굴참나무, 관음사, 자운암, 약수암. 남현동 도요지 등 신림-봉천동 일대에는 볼거리도 많다.
80년대 명동~서울광장거리 시위.

▶혜화문ㆍ동대문ㆍ광희문=혜화ㆍ명륜ㆍ동숭동 일대는 서울대가 1975년 관악으로 간 뒤 문화예술촌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혜화 로터리, 무림다방ㆍ진화춘 중국집 일대에선 학생들의 거리시위가 자주 일어났고, 근처 학사주점에서는 끌려간 학우가 강제징집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과 폭압 정권에 대한 비판ㆍ무력감ㆍ다독임ㆍ결의 등이 교차했다.

혜화 로터리와 한성대 입구역 사이에 있는 혜화문은 성북동 성곽길을 동대문ㆍ광희문으로 이어주는 조선시대 서울의 북동부 관문이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는 ‘순성(巡城)’의 중간 지점이다. 경찰을 따돌리게 해줬던 그 길이 ‘순성놀이’라는 이름으로 요즘 다시 시민들을 모은다.
광장시장 모듬전가게 할머니.

1397년 지어진 혜화문은 4대문의 동문과 북문 사이에 있어 ‘동소문(東小門)’으로도 불린다. 4소문 중 하나인 혜화문은 1413년 풍수학자 건의로 북대문(숙정문)이 폐쇄되자 한양의 북문(北門) 역할을 했다. 문지기 당직 군졸 수가 소문(小門) 20명, 대문(大門) 30명인데, 혜화문은 소문임에도 30명, 도성을 지키는 요지였다.

동대문-청계천-을지로-광희문 성곽길 주변도 ‘미싱공’과 대학생들이 연대한 노동 착취 철폐, 근로조건 개선 시위와 오뎅 국물 속풀이 풍경이 교차했던 곳이다. 청계천과 더불어 ‘못만드는 것이 없는 곳’이었던 을지로에는 타일ㆍ도기거리, 송림수제화, 원조녹두, 노가리골목, 양미옥, 공구거리, 통일집, 조각거리, 조명거리 등으로 구성된 ‘을지유람’ 추억여행 코스(매달 둘째, 넷째 토요일 오후3시)가 만들어졌다.
동대문인근 을지~청계 골목.

▶경복궁역=‘11.12 민중총궐기’때 1987년 이후 사상 최대 시위대가 몰린 경복궁역에서 부터, 청와대 서편 자하문터널 진입로에 이르는 구간은 청와대에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이 자주 집회와 거리시위를 하던 곳이다. 청와대-북촌-서촌을 이으면 삼각형이다. 북촌은 사대부 밀집지대, 서촌은 통역가 등 중인, 상인, 예인(藝人)들이 모여살던 곳이었다. 북촌은 계유정난때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살해된 고관대작 피비린내가 진동해 재를 덮어 냄새를 막았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정치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지만, 서촌은 늘 평화롭고 역동적이며 맛ㆍ멋ㆍ흥이 넘쳤다. 서촌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 시인 이상과 윤동주, 화가 박노수와 이상범, 이중섭 등이 살던 곳이다. 몇몇 인사의 옛집이 지금도 있다.

경찰이 덮칠때, 체부ㆍ통인ㆍ누하ㆍ창성ㆍ옥인ㆍ효자동 골목으로 튀면, 구수한 음식과 차향이 반긴다. 옥인동 골목 끝까지 가면 힐링의 수성동 계곡을 만난다. 맛집만 즐비하더니 최근 10년새 카페와 공예 악세사리점이 부쩍 늘었다. 통인시장의 도시락카페는 외국인들도 잘 안다. 그래도 ‘굴러온 돌’보다 오래된 중국집(영화루), 책방(대오서점), 세탁소, 칼국숫집, 감자탕집 등 ‘박힌 돌’이 더 많은 곳이다. 경복궁역 4번출구에는 대림미술관, 진화랑, 갤러리 시몬, 팔레드서울, 사진갤러리 류가헌 등 미술공간이 많다.
11·12 촛불집회.

▶서울광장ㆍ덕수궁 돌담길ㆍ신촌=이한열 추모제, 월드컵 붉은 악마 응원, 노무현대통령 노제 등이 있었던 서울광장 앞 덕수궁 일대와 신촌은 긴 몽둥이를 든 백골단이 시위대를 잡으려고 달려들면, 도망가던 남녀 학생들이 ‘연인 코스프레’ 하면서 시위대가 아닌 척 가장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높다란 덕수궁 돌담길, 이대~신촌 옷가게 거리를 걷다가 문득, 생면부지의 남녀 거리시위자 둘은 꼭 잡았던 손을 어색하게 놓는다. 덕수궁 돌담길엔 정동극장, 구러시아공사관, 서울역사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다.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국민 발라드 ‘광화문연가’를 만든 이영훈의 추모비도 놓여져 있다. 양반 주거지였던 덕수궁 돌담길은 개항기 ‘양인촌’으로 불린 신(新)문물의 집성지였다.

정동극장을 지나 서대문 로터리에 이른 뒤, 아현동 웨딩드레스 거리를 지나면 거리시위의 또다른 메카인 이대입구~신촌이 나온다. 신촌의 함성은 맥주를 연상시켜 맥주축제가 만들어졌지만, 당시 맥주 마시는 청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효사정과 흑석동=흑석동 시위대가 대로로 나오면 고립무원이라 도망할 곳이 없다. 신군부 경찰의 검거전이 잠잠해지면 시골에서 유학온 대학생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효사정에 오른다. 조선 세종 때 효자 노한이 모친상을 당한후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와 가까운 곳이다. 정인지, 서거정, 신숙주 등이 효심을 기리며 시문을 남겼다.

한바탕 “독재 타도 ”를 외친뒤 효사정에 올라와 보면 시골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공부 하라고 보내놨더니 나랏일 부터 걱정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귀에 울린다. ‘의혈’ 청년의 고뇌하는 표정이 눈에 선하다. 노들-사육신공원-효사정-흑석으로 이어지는 그 길은 최루성 추억을 돋게 한다.

삼청공원에서 출발해 성북동을 거쳐 북악 팔각정에 이르는 북악 하늘길 역시 광화문이나 대학로 시위를 마친 청년들이 한 숨 돌린 후 돌아보던 곳이다. 차 만 다니던 길이 2007년 개방되며 산책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함영훈 여행선임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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