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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별아 “데뷔시절, 문단의 성희롱 일상적이었다”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소설적인 욕심보다 한국 최초의 근대여성소설가라는 김명순이라는 잊혀졌던 사람을 복원해내는 게 중요했어요.”

소설 ‘미실’의 작가 김별아가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이자 문단의 냉대와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스러진 탄실 김명순의 삶을 오롯이 되살린 소설 ‘탄실’(해냄)을 출간했다.

김 씨는 30일 오전 프레스센터에서 출간기자간담회를 갖고, 소설적 상상력을 전혀 보태지 않고 자전적 소설과 그간의 연구 성과, 신문 기록 등을 참조해 사실에 입각해 그려냈다며, 문학사에서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서 자리매김을 해줘야 하지 않나는 책임감이 컸다고 말했다.


김명순은 1917년 문예지 ‘청춘’의 소설 공모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돼 근대여성소설가로는 첫 이름을 올렸다. 1925년 여성작가로서는 첫 소설집 ‘생명의 과실’을 펴냈고 문예지 ‘창조’의 첫 여성 동인이기도 했다. 평생 소설 23편과 시 107편 수필, 평론, 희곡 등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문단은 비열할 정도로 인신공격과 냉대로 일관했다.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과 자유연애, 성폭행 사건이 그들의 안주거리였다.
“김동인, 김기림, 방정환 선생님까지 전방위에서 집요하게 김명순을 공격했어요. 일본 유학시절, 리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한 일은 신문에 기사화될 정도로 공개됐는데, 피해자인 김명순이 몸을 제공했다는 식이었죠.”

김명순의 어린 시절 그의 삶은 풍족했다. 비록 서출이지만 평양의 거부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신식교육을 받고 피아노와 노래 문학 창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 학구열이 뜨거웠던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성폭력 사건을 겪고 귀국해 숙명고등보통학교에 재입학해 학업을 이어간다.
나혜석, 김원주(출가한 김일엽)와 함께 근대 여성 트로이카 3인방으로 불렸지만 유독 김명순만 인신공격을 받았다며, 작가는 그 이유를 아버지나 남편,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함부로 했다고 당시 문단을 질타했다.
사실 김명순은 화가 김찬영과 임노월 등과 연애를 했지만 엄마의 신분때문에 보수주의적이었고 자유연애 신봉자도 아니었다는 것.

작가가 안타까워 한 것은 염문과 추문에 가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문단과 세상의 오해를 풀고 항변을 하기 위해 소설을 쓰다보니 미완성인 작품이 많았다.
아버지가 죽고 방패막 없이 세상의 따돌림을 당한 김명순은 이병도의 집에서 책 교열과 교정을 하며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다. 문학적 저항으로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고 고아 소년을 입양해 가족을 일구기도 했지만 경제적, 사회적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김명순은 50년대 중후반께 일본 도쿄의 닭장안에서 끝내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김 씨는 “30,40년대 식민지 남성들이 또 다른 식민지로 삼은 건 여성이었다”며, 문단이 윤리적이지 않은 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제가 23년차 작가인데 데뷔할 때만 해도 문단이 남성중심적이었어요. 여성 지위라는게 김명순 시대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성희롱이 일상적이었고 남성중심적 폭력적인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때도 있었어요. 아마 여성작가의 작품이 팔리면서 지위가 바뀌지 않았나 싶습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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