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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라의 가스등
“미쳤기 때문에 당신을 증오해. 미쳤기 때문에 당신을 배신해.” 

영화 ‘가스등(1944년)’의 클라이맥스에서 잉그리드 버그먼(1915~1982년ㆍ극중 이름 폴라)은 폭발했다. 전작(前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3년)’에서 “난 키스할 줄 몰라요. 코는 어디에 둬야 하나요?”라고 했던 순진무구한 여성은 온 데 간데 없었다. ‘카사블랑카(1942년)’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그녀의 깊고 청초한 눈에 빠져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이란 불후의 명대사를 날렸지만, ‘가스등’의 막판에선 잉그리드의 눈은 증오로 가득찼다.

자신을 정신이상자로 만들려 했던 남편의 파국을 힘껏 저주했다. 이 영화 속에서 반추해 볼 건 “난 너무 행복해서 비극을 이해 못해요”라며 만난지 2주밖에 안 된 남성에게 푹 빠진 한 여성이 결혼 뒤 철저히 농락당하는 과정이다. 


남편은 용의주도했다. 잔망스러운 손재주로 아내를 건망증 환자 취급했다. 실상은 절도ㆍ살인범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음습한 행동을 덮으려 그녀에게 과대망상증까지 덧칠했다.

조작을 통해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일은 ‘일도 아니다’라는 교훈이 남았다. 아름답고 고혹적인 외모에 섬세한 감정표현까지 더해진 잉그리드는 ‘가스등’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극중에서 희미하게 조작되는 가스등의 의미는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영화를 직접 보며 되짚어 볼만하다.

106년 전 오늘(8월 29일)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째로 빼앗아 간 국치일이다. 그동안 얼마나 숱한 조작이 있었고, 이로 인해 고통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데도 눈치가 보이는 세상이다. 그래서 생일과 사망일이 8월 29일로 동일한 잉그리드를 꾸역꾸역 갔다 댔음을 고백한다. 그녀의 베일 듯한 콧날에 건배를!

홍성원 기자/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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