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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스 카페] 日 전쟁역사 왜곡…‘뿌리깊은 500년’
임진왜란 이후 일본 침략전쟁 문헌
오랜기간 거쳐 전쟁 정당화 재생산

김시덕 교수, 비망록 등 기록 파헤쳐
‘전쟁의 문헌학’적 역사관 변화 탐색



일본의 역사왜곡은 그 뿌리가 깊다. 어느날 갑자기 역사교과서를 고친 게 아니다. 500년전 임진왜란때부터 일본은 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허구적 기술을 서슴치 않았다. 역사적 사실이라도 자신들의 입장과 모순되는 것들은 무시하고 고쳤다.

일본 근세문헌 연구자인 김시덕 교수(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가 16~19세기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들을 기술한 문헌들을 모두 검토한 결과를 보면, 일본은 이런 오랜 과정을 통해 침략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재생산해왔다.


김 교수의 ‘일본의 대외전쟁’(열린책들)은 2011년 일본에서 출간했던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저자는 16~19세기 조선정벌(임진왜란), 시마즈 가문의 유구왕국(현 일본의 오키나와 현) 정복(1609년), 진구코고의 ‘삼한 정벌 전설’, 그리고 일본, 에조(일본 도호쿠 지방 및 홋카이도 지역), 러시아 세 집단이 에조치(홋가이도)를 무대로 전개한 충돌 등 근세기 일본이 벌인 침략 전쟁들을 기록한 문헌들을 총 망라했다.

책의 절반은 임진왜란에 할애돼 있다. 여기에는 전쟁의 체험을 기록한 비망록, 견문록을 포함해 ‘다이코기’‘조선군기대전’‘조선태평기’ 등 역사류와 소설이 포함됐다. 또 ‘징비록’‘양조평양록’‘무비지’ 등, 명과 조선의 문헌도 다뤘다.

일본 중세와 근세의 경계에 발생한 한ㆍ중ㆍ일 삼국간의 국제전쟁인 임진왜란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 수 많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일본에서는 비망록, 견문기, 전기. 실록체 소설 등 숱한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임진왜란 문헌군’으로 분류할 정도다.

이 임진왜란 문헌군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집필자가 어느 가문 출신이냐에 따라, 또 지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비망록, 견문록 형태의 임진왜란 초기 문헌은 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1637년 오제 호안에 의해 ‘다이코기’로 집대성된다.

17세기 전기에는 중국 명나라에서 제갈원성의 ‘양조평양록’과 모원의의 ‘무비지’가 일본에 들어오게 된다. 그 영향을 받아 호리 교안의 ‘조선 정벌기’, 하야시 라잔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 아사이 료이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전’, 시마즈 히사미치의 ‘정한록’등이 출간된다. 17세기 후기에는 중일 양국의 임진왜란 관련 기사를 집성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일본은 ‘양조평양록’‘무비지’등의 기사 중 일본에 적대적인 내용은 빼고 양국의 내용이 충돌하는 경우 일본 문헌 기사를 채택, 새롭게 집대성한다.

특히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입장을 배려해 신중한 집필 태도를 취했다. 가령 오제 호안은 마에다 가문과 호리오 요시하루 가문을, 호리 교안은 아사노 가문, 하야시 라잔은 도쿠가와 가문, 시마즈 히사미치는 시마즈 가문을 대변했다.

17세기 후기에는 류성룡의 ‘징비록’과 ‘서애 선생 문집’이 일본에 전해진다. 이로써 한중일 삼국의 임진왜란 관련 문헌이 모두 일본에 모이게 된다. 이들을 집대성한 것이 1705년에 간행된 세이키의 ‘조선 군기 대전’과 바바 노부노리의 ‘조선태평기’이다.

저자는 ‘조선 군기 대전’은 선행 문헌의 기술을 충실히 따른 반면, ‘조선태평기’는 흥미로운 읽을거리 중심으로 기술, 근세 일본 문헌이 단순히 중국, 한국 문헌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담론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의가 있다고 본다.

후쿠오카 번과 쓰시마 번에서 번의 공적 업무를 위해 저술된 18세기 전기 문헌인 가이바라 엣켄의 ‘구로다가보’와 마쓰우라 스케토의 ‘조선통교대기’도 흥미롭다, 둘의 임진왜란관에는 차이가 있다. 엣켄은 임진왜란 당시 민중이 피해를 입은데 동정적이면서 주군 가문의 활약을 칭송한 반면, 스케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18세기 중후기, 대중을 상대로 출간된 ‘조선 정벌 군기강’과 ‘에혼 무용 다이코기’의 경우도 대조적이다. ‘조선 정벌 군기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반감을 드러내는데 이는 오사카 청중을 대상으로 필사본 형태로 유통됐기에 가능했다. ‘에혼 무용 다이코기’는 ‘조선 정벌 군기강’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반감은 모두 삭제했다. 막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삽화가 많이 배치된 장편역사소설형태인 ‘에혼’이 출현한다. 아키사토 리토의 ‘에혼 조선 군기’와 다케우치 가쿠사이 글, 오카다 쿄쿠잔 그림의 ‘에혼 다이코기’등이다, ‘에혼 조선 군기’의 경우 ‘징비록’의 내용을 변형 없이 갖다 썼다.

19세기 쓰시마 번의 부산진 대관이었던 야마자키 히사나가의 ‘양국 임진 실기’를 비롯, ‘조선정토시말기’‘정한위략’등에 오면 일본의 무위를 선양하고자 하는 노골적인 의도가 드러난다. 역사와 문학 사이에 존재했던 임진왜란 문헌들이 사라지고, 근대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보여주는 문헌으로 바뀐 것이다.

저자는 200년간의 일본 임진왜란 문헌물 분석을 통해 일본의 전쟁 문헌 집필자들은 자국과 외국의 문헌을 방대하게 참고하면서 자국의 입장과 모순되는 사실들은 대체로 무시했고 허구적 기술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고 평가한다. 당시 히데요시의 위기감과 근세말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연결시킨 점은 시사적이다. ‘전쟁의 문헌학’이라는 관점에서 역사관의 변화를 탐색한 점이 흥미롭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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