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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죄와의 전쟁’ 50일… 희망과 공포 뒤섞인 필리핀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필리핀의 범죄자를 6개월 안에 뿌리뽑겠다고 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한 지 50일이 지났다. “범죄자에겐 총알도 아깝다”고 했던 그가 집권한 뒤, 공식적으로는 ‘사형제 폐지국’인 필리핀에서는 1000여명의 마약 용의자가 사살됐다. 어쩌면 범죄 없는 세상에서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에 국민의 지지는 하늘을 찌른다. 반면 국제사회와 인권단체는 눈 앞의 인권 유린에 우려하는 한편, 장기적인 성공 가능성에도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징벌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두테르테는 필리핀에서 범죄를 없애겠다는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공포 정치’라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그에 대한 지지율은 현재까지도 고공행진 중이다 [사진=게티이미지]

▶ 분노와 손 잡은 두테르테… 눈 앞의 성공에 환호하는 국민들

마틴 안다나르 대통령궁 공보실장은 18일 두테르테 취임 50일을 맞아 참석한 한 포럼에서 “두테르테의 첫번째 성과는 경찰(PNP)과 군(AFP), 그리고 시민 사이에 있는 마약 밀매업자와 구매자를 항복시켰다는 것”이라며 “투항한 사람이 약 60만 명이다”라고 했다. 이어 그는 “두번째 성과는 범죄율을 낮춘 것이다”라고 자평했다.

그의 말마따나 두테르테가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한 이후 필리핀에는 자수하는 마약 범죄 혐의자들이 급증하며 교도소가 과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감방이 부족해 수감자들을 계단이나 복도, 체육관 등에 수용하는 일도 빈번하다. 범죄율 역시 뚝 떨어져 7월 발생 범죄가 5만817 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8% 줄었으며, 살인ㆍ강간ㆍ강도 등 중범죄는 1만1800건으로 전년 대비 31% 감소했다.

아시아에서 살인사건 비율이 가장 높다는 필리핀(세계은행 조사 2013년 기준)에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두테르테는 대통령이 되기 전 무법상태에 가까웠던 다바오 시에서도 20여년간 시장을 지내며 치안을 개선해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지난달 우리 정부도 다바오의 치안 상황이 좋아졌다며 여행경보단계를 낮췄다.

사실 필리핀의 마약 문제는 ‘전쟁’이 필요할 만큼 심각하다. UN에 따르면 현지에서는 ‘샤부’(shabu)라 부르는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사용률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다. 두테르테는 필리핀에 300만 명의 마약 중독자와 60만 명의 밀매업자가 있다고 했다. 마약을 거래하는 조직범죄가 횡행하고, 경찰과 사법기관 역시 부패의 고리에 걸려든 상태다. 두테르테는 이달 초 판사ㆍ의원ㆍ군장성ㆍ경찰ㆍ지방 시장 등 150여명을 마약 연루 혐의자라고 공개했는데, 잘못된 정보가 일부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그 마수가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국민들은 91%라는 유례없이 높은 지지율(7월 기준)로 환호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두테르테가 조국의 무법상태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친구가 됐다”라고 표현했다.

▶ ‘유죄 확신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 “사적 폭력만 넘쳐날 것”

문제는 마약 범죄를 일소한다는 명분 하에 마구잡이로 용의자들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두테르테는 마약 밀매업자를 발견하는 즉시 사살하라는 이른바 ‘슛 투 킬’(shoot-to-kill) 정책을 쓰고 있다. 죄의 유무와 경중, 발생 경위에 대해 법관이 판단할 겨를이 없다. ‘무죄 추정의 원칙’ 대신 ‘유죄 확신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마닐라의 피에타(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작품)’라고 알려진 사진 속 주인공, 마이클 시아론(29)의 사연은 이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마닐라에서 인력거를 모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던 시아론은 지난달 한 괴한의 총에 맞고 숨을 거뒀다. 괴한은 시아론 옆에 마약밀매업자라는 뜻의 ‘푸셔’(pusher)라는 단어가 쓰인 종이를 놓고 갔다. 그러나 시아론의 아내 올라이레스는 “남편이 필로폰을 투약한 적은 있지만 밀매를 한 적은 없다”며 남편의 주검을 안고 울부짖었다.

의심이 가는 사람을 무턱대고 사살하고 나서 밀매업자라고 낙인 찍는 종이를 던지고 가는 것. 현지에서는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정식 공권력이 아닌 자경단이며, 두테르테가 자경단의 이런 행동을 부추기고 있다고 의심한다. 두테르테는 다바오에서도 직접 자경단을 조직했다는 의혹이 있다.

두테르테의 방식은 가뜩이나 치안과 공권력 공백 상태에 놓여 있는 필리핀에서 사적 폭력을 부추기고 법에 의한 지배를 약화시킬 수 있다. 개인적인 복수심이나 이익을 위해, 라이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사람을 죽여놓고도 범죄자이기 때문에 죽였다는 식의 핑곗거리를 줄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에서 “자경단을 조장하는 것은 정부 기관의 힘을 더욱 약화시키고 공식적 처벌이 없는 문화를 강화할 것이다. 두테르테는 전염병처럼 퍼진 범죄의 기원인 부패와 법에 대한 무시를 목표로 삼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마닐라에서 인력거를 모는 일을 했던 시아론은 마약밀매를 했다는 범죄를 뒤집어 쓰고 정체모를 괴한에 살해당했다. 그의 아내가 시아론을 안고 있는 모습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을 연상시킨다 [사진=게티이미지]

▶ 지름길은 없다… 속도전식 ‘범죄 청소’의 결말

많은 전문가들은 두테르테가 벌인 전쟁이 부작용만 낳은 채 실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 범죄의 근원이 된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려 하지 않은 채 수박 겉핥기 식 대응만 하다가는 꼬리만 쳐내는 결말만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아시아 지부 부회장인 펠림 키네는 “살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약하고 가난한, 그래서 대상이 되기 쉬운 사람들이다”라며 “그들은 중심인물(kingpin)이나, 마약 수출입업자가 아니며, 필리핀의 길거리에 마약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영국 포츠머스대학 국제관계학 강사 톰 스미스는 두테르테가 마약 문제에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하느라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마약은 필리핀에서 많은 이슈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두테르테는 마약 범죄가 많은 사회 문제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증상에 가깝다는 점을 이해하는데 실패했다”며 “더 많은 살해를 조장하기 전에 마약을 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이야기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다바오는 고작 한 개의 시(市)에 불과한 지역이어서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7000여개의 섬들이 있는 필리핀이라는 하나의 국가에는 현실적으로 공권력이 미치기 힘들어 같은 방식으로 성과를 보기 힘들 것”이라며 “지금처럼 속도전 식으로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적법한 절차에 따라 문화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이 연구위원은 또 국제사회의 압박 때문에 두테르테의 현 방식을 장기간 유지하지도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필리핀은 중국과 영토 문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데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인 상황이다. 미국으로부터 인권 문제를 지적받으면 외교적으로 불편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두테르테의 ‘공포 정치’가 휩쓸고 간 필리핀의 머지 않은 미래를 이렇게 그렸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있었던 ‘마약과의 전쟁’의 교훈은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폭력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당할 것이며, 원한을 갚기 위해 이용되거나 갱단이 라이벌 세력을 제거하는 데 이용될 것이다. 필리핀인들의 즉각적인 응징에 대한 욕망은 공포와 증오와 복수로 바뀔 것이다. 법의 지배는 침식될 것이다. 최근 몇년 사이 필리핀을 세계화의 승자 중 하나로 만들어줬던 투자자들은 떠날 것이다. 유일한 승자는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반란군들일 뿐이다. 두테르테의 계획이 잘못 세워진 마약과의 전쟁은 필리핀을 더 가난하고 더 폭력적으로 만들 것이다.”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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