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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17. 퍼레이드ㆍ플라멩코…정렬의 세비야 ‘축제의 하루’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부활절 축제(세마나 산타, Semana Santa)의 이틀째 날이 밝는다. 숙소도 세비야의 구시가에서 약간 벗어난 외곽이라서 대성당이 있는 승리의 광장(Plaza del Triunfo)까지 걸어서 나간다. 거리는 아침부터 축제의 흥겨움에 들썩이고 있다. 파란 하늘과 건물마다 빨간 휘장이나 꽃으로 치장한 거리는 축제 기분을 북돋워 준다.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을 눈으로 보는 기분이 든다.
대성당 앞에 잠시 앉아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다가온다. 그녀는 다짜고짜 약초를 들이밀며 내 손에 쥐어주려 한다. 손금을 봐주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집시이고,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운명을 이야기하고 나서 돈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자연스레 손을 뿌리치고 뒷걸음을 치게 된다. 그리고 보니 대성당 앞은 이런 집시 아주머니들의 아지트다. 누구든 그녀들의 손길에 걸려 나뭇잎을 쥐게 되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성스러운 부활절 축제, 그 대표 격인 대성당 앞의 풍경이 기이하다.
오전의 세비야 거리는 평온하면서도 축제의 기운에 한껏 들떠있다. 대성당에 입장할 수 없으니 대신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밖에서 쳐다보는 카테드랄(Catedral)은 웅장하고 고풍스럽다. 스페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당인 이곳은, 바티칸의 산 삐에뜨르 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 다음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라고 한다.

히랄다 탑(La Giralda)은 12세기 이슬람교도들이 세운 것으로 대성당 부속건물이다. 가톨릭의 교회에 이슬람교도의 탑이 공존하는 대성당, 4월의 따가운 햇살이 축제의 세비야를 빛낸다.
대성당이 있는 승리의 광장 장 북쪽 산타크루스 지구(barrio de santa Cruz)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린다. 17세기 세비야 귀족들이 살던 거리인 구시가는 세비야의 옛 모습을 보여 준다. 

작은 골목마다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 등 여행자 편의시설이 줄을 서 있지만 스페인 남부 지방 안달루시아의 특유의 건물이 많다. 인파가 몰린 곳을 따라가다 보면 교회를 몇 군데나 들르게 된다. 어느 곳이나 북새통이 따로 없다. 아이들이 안내를 해주는 곳도 있고 방문객에게 스티커를 붙여주기도 하는 등 세마나 산타의 분위기가 무르익는 한낮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톨릭 국가들을 많이 방문하게 되고 30일간 걸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역시 가톨릭의 순례길이라 많은 성당과 교회들을 지나왔다. 하지만 축제 중의 세비야에서는 색다른 느낌이 든다. 부활절 축제의 한 가운데에서 들러본 교회들은, 교회 자체보다 그 많은 사람들로 인상에 남는다.
골목을 따라 산타크루스 지구의 언덕을 오른다. 전통적인 하얀 집의 대문 안쪽으로는 이 지방 특유의 아름다운 안뜰이 보인다. 연중 태양이 따사로운 스페인 남부, 이슬람교와 가톨릭, 아프리카와 유럽 문화를 향유한 곳이 바로 이곳 안달루시아 지방임을 바로 인식하게 된다. 

언덕 위까지 올랐다가 플라멩코 공연 예약을 마치고 광장으로 돌아온다. 한낮으로 접어들자 거리는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어쩌다 지나치는 동양인 관광객들에게서 한국말이 들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햇빛은 무섭게도 뜨겁고 사람들은 그늘을 찾는다. 슬슬 자리를 잡고 멀리서 울려오는 퍼레이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시내를 돌아 대성당 앞으로 오는 행렬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 오후 3시쯤 되니 멀리서 행진해 오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온다. 북소리의 리듬에 맞춰 심장도 쿵쿵쿵 울린다. 부활절 축제는 16세기 이래 카톨릭국가인 스페인 전역에서 열리는 유일한 축제라고 한다. 그중 가장 성대한 축제가 세비야에서 열린다고 하니, 그야말로 장관이다.

예수의 고난을 묘사한 조각상이나 성모 마리아, 예수의 조각상 등으로 이루어진 퍼레이드가 천천히 움직여 온다. 그 뒤를 뾰족한 모자를 쓰고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따라 걷는다. 거리는 이미 축제의 장이다.
여기에 참여하는 것이 아마 큰 영광인 듯, 행렬에는 아이들도 많다. 아이들이 행렬을 따르면 부모들을 그 행렬을 따라가면서 아이들은 챙긴다. 이미 퍼레이드를 끝낸 아이들은 옆으로 빠져나와 소풍이 끝난 표정으로 음료를 마시기도 하고 놀기도 한다. 부활절 축제의 중심에는 이렇게 퍼레이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세비야 사람들이 있다. 

퍼레이드를 하는 사람들은 각 소속 교회마다 다른 복장이다. 원뿔 모양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린 참회자의 모습으로 걷는다. 어떤 어른들은 아예 맨발로 걷기도 하지만, 양말을 몇 겹씩 신고 신을 신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자세히 보니 조각상을 실은 마차에는 바퀴가 없다. 마차 아래에 사람들이 들어가 등을 구부려 움직이는 것이다. 예수의 고난을 이 정도 나마 흉내라도 내보는 것일까?
대로를 지난 행렬들은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집집마다 발코니에 빨간 천을 달아 축제 분위기를 내기도 하지만, 그렇게 장식된 발코니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행렬을 내려다본다. 거기에 수많은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따르고 있다. 바로 어제 숙소 근처에서 봤던 모습이다. 이렇게 골목을 돌아서 대성당으로 가는 것이었다.
축제는 밤까지 계속될 것이기에 잠시 사람들과 북소리에서 멀어지기로 한다. 구시가의 북적임이 사라지고 갑자기 고요해진 오후의 강바람이 반갑다. 강변의 황금의 탑(Torre del Oro)에 다다른다. 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떠난 항구였던 황금의 탑은 지금은 해양박물관이 되어있다. 대항해시대의 영광은 포르투갈에 이어 스페인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를 지배하던 이베리아 반도의 역량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황금의 탑에 꼭대기에 올라 과달키비르 강과 세비야 시내를 조망한다. 건너편 신시가는 현대적인 대도시가 펼쳐져 있지만 이쪽의 구시가는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황금의 탑에서 내려오니 길어진 그림자와 차가워진 강바람이 반긴다. 강변의 벤치에서 엽서를 쓴다. 여행자의 하루는 신기하고 낯선 것들로 채워져 흥미진진하지만, 이렇게 멈추어 있는 시간에는 교감할 사람이 그립기도 하다. 이미 많이 단련됐지만, 그리움을 겪어내는 것, 외로움을 수용하는 것이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해지는 거리에 행렬이 계속되는 걸 보면서 대성당근처로 간다. 예쁘게 차려 입은 여자들, 멋내고 나온 남자들, 귀여운 아기들, 어린이들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들, 그리고 여행자들까지,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하다. 종교가 사람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구심점임은 인도에서 많이 경험하고 왔지만, 여기 스페인의 그것은 같으면서도 또 다른 깊이와 느낌으로 다가온다. 스페인에 와서 이렇게 많은 스페인 사람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산타크루스 지구의 제일 꼭대기로 올라온다. 아까 오전에 예매해 둔 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8시 15분에 시작되는 공연이다. 오전에 예매할 때 예매번호가 1번이어서 사람이 너무 적으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로스 가요스(Los Gallos)라는 이 공연장은 세비야에서 가장 오래된 타블라오(Tablao : “판자를 깔다”라는 뜻으로 플라멩코 무대)라고 하더니 역시 명불허전, 객석이 꽉찬다. 음료 한 잔을 서빙해 준다기에 샹그리아를 주문해서 앞자리에 앉는다. 작은 무대가 전부라서 과연 어떤 공연이 될지 궁금하다.

가수와 기타연주자가 자리를 잡는다. 곧 기타가 연주되고 가수는 박수를 치며 노래를 시작한다. 성량이 픙부한 가수의 노래는 애절하다. 게다가 박자를 맞추는 그의 박수는 또 하나의 악기가 되어 울린다. 기타리스트 역시 멋진 음악을 선사한다. 그리고 몸집이 통통한 중년의 댄서가 화려한 플라멩코 의상과 구두를 신고 등장한다. 음악이 연주되자 그녀는 발을 절도 있게 구르며 몸을 날렵하게 돌리면서 격렬하게 춤을 춘다. 캐스터네츠를 울리며 손목을 돌리며 박자를 맞추기도 하고 가수와 기타연주자와 교감하며 발을 구른다. 나비처럼 여린듯하다가 어느새 허리케인을 몰고 오는 그녀의 몸놀림에 관객들은 숨을 죽인다. 온 몸과 온 마음이 춤에 스며드는 게 느껴진다.
이어서 남자 댄서의 격정적인 공연이 이어진다. 가수와 기타연주자도 팀을 이루어서 무대를 바꾸며 연주한다. 춤과 노래를 함께 하는 여자 댄서도 공연을 한다. “정열”이라는 단어가 이만큼 잘 어울리는 공연을 본 적이 없다. 댄서의 이마를 적시는 땀방울에 격한 박수를 보내게 된다. 플라멩코 댄서는 나이가 들수록 더 그 깊이를 표현할 수 있다고 하더니 공연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것 같다. 이 공연장이 왜 단체를 받지 않는지, 이런 소극장에서 공연하는데도 왜 세비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지도 알겠다. 플라멩코는 그 노래도 기타선율도 춤도 삶의 애환이 애잔히 녹아있다. 예쁘고 아름답기보다는 숨 가쁘고 열정적이다. 이런 춤을 표현해 내는 것은 절대로 가녀린 몸매의 어린 댄서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공연 중에 사진을 찍을 수 없고 단체로 공연하는 마지막 무대만 카메라가 허용된다. 사진에 이 공연의 마지막 “정열”을 담아보지만 서투른 사진사의 솜씨로는 어림도 없다. 그렇게 춤과 노래가 끝날 무렵 시작된 박수는 끝날 줄 모른다. 작은 공연장은 열기로 가득하다.
스페인에 왔으니, 그것도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중이니, 게다가 세비야에 머무르고 있으니 의무감으로 예약한 공연이었다. 이렇게 멋진 공연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감동이 줄어들었을까? 오늘 플라멩코 공연은 예상외의 감동이다.

오늘 오후 인파속에서 퍼레이드를 지켜보다가 황금의 탑에 다녀와서 또 퍼레이드를 보고 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다시 대성당으로 왔는데도 아직도 퍼레이드는 계속되고 있다. 밤이 깊어가는 데도 사람들은 더 많아진다.
야심한 시각인데 사람들은 마치 한낮이라는 듯이 거리를 활보한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둥둥 북소리가 울리고 퍼레이드는 계속된다. 각국의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가게마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축제가 절정인 늦은 시각이어도 술에 취한 사람은 볼 수 없다. 이렇게 밤을 지새운다 해도 거리는 안전하고 사람들은 건전하고 축제는 계속될 것이다. 일주일간의 부활절 축제를 하루에 다 치른 듯하다. 축제 같은 하루가 아닌, 진짜 축제의 하루였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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