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147일간의 세계여행] 114. 여기는 호카곶…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다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리스본 근교 신트라, 호카곶, 카스카이스를 하루동안 돌아보는 날이다. 먼저 세계문화유산인 페나성(Palacio National do Pena)이 있는 신트라(Sintra)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신트라(Sintra)는 아기자기한 관광지 마을이다. 세계문화유산인 페나성부터 보기로 하고 434번 버스에 탄다. 순환버스가 내려주는 곳에서 티켓을 사고 성의 입구에 들어가 다시 페나성으로 가는 관광용 버스표를 사서 줄을 서야 한다. 입구에서도 성은 멀다. 세계문화유산인 만큼 대기하는 사람도 많다.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페나성으로 들어간다. 구름이 많아서 하늘은 잿빛이다. 맑았으면 좋겠지만 이런 풍경도 운치는 있다.


동화 속의 성처럼 깊은 산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페나성의 노란 빛깔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독일 퓌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세운 루드비히 2세의 사촌인 페르디난도 2세가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퓌센에서의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실제로 가 본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러나 정치를 외면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아름다운 성을 짓는다는 루드비히 2세의 집착으로 무리하게 설계되어 완성되었고, 정작 루드비히 2세는 얼마 살지도 못하고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사촌인 페르디난도 2세가 이곳에 그 성을 본떠 페나성을 건설한 것이다. 세세한 역사는 잘 모르지만 그런 사연을 알고도 온갖 양식을 동원해지었다는 페나성에서 씁쓸함을 느낀다.


고딕 양식, 이슬람 양식, 마누엘 양식, 르네상스 양식 등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건축된 페나성은 내부 역시 화려하고 섬세하다. 전망도 좋다는데 오늘 오전에는 안개가 풍경을 조금씩 가리고 있어 신비한 분위기는 연출되지만 테주강, 대서양이 보이기는커녕 성의 첨탑조차 희미하게 보인다. 각종 양식이 어우러져 아름답다는 찬사를 듣는 성채라는데, 날씨 탓인지 기분 탓인지 예술을 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이 화려한 페나성의 모습이 내 눈에는 조화로워 보이지 않는다.
페나성을 빠져나와 신트라 시내로 내려가는 셔틀버스를 탄다. 기차역으로 가지 않고 왕궁 앞에서 내려서는데, 산 밑으로 내려와서인지 한낮이 되어 구름이 사라진 건지 하늘이 거짓말처럼 개여있다. 왕궁 역시 무데하르, 고딕, 르네상스, 마누엘 양식 등 다양한 양식으로 지어졌다는데, 전체가 흰 색으로 칠해져서인지 페나성보다는 차분한 느낌이다. 이곳 역시 무어인의 요새를 나중에 왕의 여름 별장으로 개조한 곳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역사적, 지리적인 요건으로 이슬람과 유대교, 가톨릭 문화가 어우러져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고 이렇게 특이한 건물들이 남은 것이다. 왕궁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다. 싸늘하게 느껴지던 날씨도 햇살에 금방 따뜻해진다. 내 눈에는 왕궁에서 바라보는 신트라 시내가 페나성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다.


동화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거리에는 중세인 듯 관광객을 태운 마차가 지나가고 작은 뒷골목 식당이나 매장 문 앞에는 실물 크기 인형들이 손님을 반긴다. 골목의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고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시간이 휙 지나간다. 레스토랑에 사람들이 바글거릴 무렵, 기차역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버스에 올라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 : 호카곶)로 간다. 버스는 이제 바다를 향해 달린다.


서쪽 바다로 향하던 버스가 정차한 곳은 바람만 거칠게 불어 대는 벌판(?)이다. 주차장에는 패키지 관광객을 태운 대형버스들이 이미 가득하다. 쓸쓸할 줄 알았던 대륙의 서쪽 끝에는 예상외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 있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빨간 등대와 그 반대편의 십자가가 선명한 기념비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 대서양이 출렁이고 있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포르투갈의 위대한 시인 카몽이스의 글귀가 새겨진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 기념비다. 이곳은 유럽 대륙의 서쪽 끝이다. 그전의 세계관으로는 지구의 끝이던 이 바다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며 신대륙을 찾아 범선을 띄우고 닻을 올렸을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이번 여행에서 인도 대륙의 남쪽 끝 깐야꾸마리, 남극과 마주 보는 아메리카 대륙의 끝 우수아이아에 다녀왔고, 스페인의 북부를 걸어서 내 걸음만으로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끝 피스테라까지 걸었다. 이제 네 번째 끝과 마주한다. 깐야꾸마리에서의 내가 느낀 “끝”은 바로 “시작”이었지만, 우수아이아에서는 그렇게 단정할 수 없는 흔들리는 마음을 알았다. 피스테라에서의 끝은 한 달 간의 걷기를 마감하며 더 이상 걸을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감동의 피날레였다.


그리고 지금 여기는 호카곶이다. 오전에 흐렸다가 정오에 새파랗게 맑던 하늘이 다시 구름을 깔아놓는다. 짙은 바다와 세찬 바람이 내게 말한다. 끝을 몇 번 마주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끝”과 “시작”과 일련의 “과정”에 대해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이 있을 뿐이라고.
호카곶에서는 신트라로 되돌아가는 버스와 카스카이스로 가는 버스가 있다. 나는 카스카이스로 간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친절한 현지인을 만나 넓지 않은 이곳 지리를 파악한다. 역에 들러 리스본으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을 확인한다. 해변으로 유명한 이곳은 세련된 관광지 포스가 물씬 풍긴다.


이곳도 서쪽 바다인데,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절벽 끝에서 바라보던 호카곶의 대서양과는 다르다. 가는 곳마다 풍경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기차나 버스로 40여분을 이동하는데 장소을 옮길 때마다 하늘빛이 다르니 하루가 세 배로 늘어난 기분이다. 카스카이스의 하늘은 호카곶에서 방금 도착한 나에겐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파랗다.


외국인 여행자보다는 현지인들이 휴양지인 듯하다. 요일 따위 상관없는 여행자의 신분이라 몰랐는데 오늘은 토요일이다. 가족 단위의 사람들과 애완견들까지 많은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해변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를 걷다가 벤치에 앉아 바다와 사람들을 바라보며 엽서를 쓴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는데 벌써 그림자가 길어진다. 대서양과 작별을 하고 역으로 돌아가 리스본행 열차에 오른다. 교외 풍경이 일몰 속에서 빨갛게 사라질 즈음 열차는 리스본에 도착한다. 



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