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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뷰] 비움과 절제의 미학…이보다 더 완벽한 ‘햄릿’은 없다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이것은 나의 무대, 나의 연극, 배우는 나야, 자넨 관객이고. 사라지는 건 내 몫이고 남는 것은 자네 몫이지…나의 대사는 끝났다. 모든 것이 지나갔다. 남은 것은 침묵 뿐.”

연극 ‘햄릿’의 2막 엔딩. 비탄에 몸부림치는 호레이쇼를 뒤로 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햄릿이 읊조린다. 그의 마지막 대사가 끝나자 막이 오른다.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유인촌, 윤석화, 손봉숙, 한명구. ‘햄릿’의 배우 9명은 텅 빈 객석을 향해 걸어 나간다. 극을 시작할 때 들고 나왔던, 모양이 제각각인 놋그릇을 성배처럼 집어들고, 의식을 마친 ‘제사장’ 같은 모습으로 천천히, 경건히…. 눈부신 조명이 이들을 비춘다.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명료하게 던지며 배우들은 사라지고 관객은 남겨진다. 

2막에서 햄릿(유인촌)과 레어티스(전무송)의 대결 장면. [사진제공=신시컴퍼니]

12일 막 오른 연극 ‘햄릿’은 시간과 연륜이 빚어낸 걸작이었다. 한국 연극계 거목 고(故) 이해랑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역대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들이 만든 이 작품은 연극 무대를 지켜온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배우 대부분이 환갑을 훌쩍 넘겼지만, 무대 위에서 나이는 보이지 않았다. 9명의 배우 모두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배역과 하나가 됐다. 특히 주인공 햄릿을 연기한 유인촌은 바이블이 될 만한 무대연기를 보여줬다. 딕션(Diction)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왜 다시 그가 햄릿이어야 하는지를 증명했다. 

2막 엔딩 장면. [사진제공=신시컴퍼니]

배우들의 연기 이 외에도 놀라움을 주는 요소들이 넘쳤다.

일반적인 프로시니엄(Proscenium) 무대를 벗어나, 국립극장 무대 위 삼면을 고대 그리스 원형극장을 연상케 하는 객석으로 바꾼 시도는 참신했다. 관객을 극의 한 축으로 끌어들인 무대였다.

배삼식의 극본은 17세기 영국의 고전을 오롯이 지금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다. 운문과 산문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들었다. 안무를 지휘한 안은미는 배우들의 몸짓을 시(詩)적으로 응축시켰다. 느리지만 강렬했다.

박동우의 무대디자인과 김창기의 조명디자인은 모던 미니멀리즘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오로지 조명만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입체적으로 부각시켰다. 관조적인 무대와 조명은 빛으로 공간을 연출하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연상케 했다. 배우들의 내면을 비추며 영적인 순간들을 빚어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건 8할이 손진책 연출의 힘이다. 비움과 절제의 미학으로 한 편의 풍요로운 ‘오케스트라’를 완성했다.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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