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쌀롱인터뷰] 서태지 명곡에 ‘칼’을 댄 사나이
카뮈소설 ‘페스트’ 각색한 뮤지컬에 원곡 노랫말 그대로…“편곡의 묘미 최대한 살릴 것”
겁없는 뮤지컬음악계 기린아…뮤지컬 ‘페스트’ 음악감독 김성수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익숙한 대사, 아니 노랫말이다. 특히 ‘응칠(응답하라 1997)’ 세대에겐 더욱.

이건 또 어떤가. “내가 가는 길은 어딜까. 앞이 막혀 있는 것 같아. 난 또 주저앉고 마는가. 누가 나의 손을 좀 잡아줘.” 

맞다. ‘환상속의 그대’이고, ‘죽음의 늪’이다. 세기말을 목도했던 X세대의 ‘문화 대통령’, 서태지의 명곡들이다. 

옷차림에 문신까지, 겉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멋 부리는 흔적이 역력하달까. 팔뚝엔 라틴어‘ 니힐(Nihil)’이, 목 뒤에는‘ 2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지적 허영심(?)도 넘친다. “뮤지컬보다 연극이나 무용극에 압도된다”는 그는 잭 케루악(Jack Kerouacㆍ1922-1969)이나 윌리엄 버로우즈(William Burroughsㆍ1914-1997) 같은 미국 비트제너레이션 소설을 좋아하고, 피나 바우시(Pina Bauschㆍ1940-2009)의 공연은 모두 다 봤을 정도로 팬이라고 했다. 뮤지컬 조감독을 뽑을 때도 장 뤽 고다르나 프랑소아 트뤼포의 영화를 좋아하는, 소위‘ 오타쿠’ 기질이 있는 사람을 뽑는다고. 남다른 감각엔 이유가 있었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서태지의 노래들이 뮤지컬로 부활한다. 심지어 원곡 노랫말이 그대로 쓰인다. 창작 초연되는 뮤지컬 ‘페스트(7월 22일~9월 30일, LG아트센터)’에서다.

서태지 노래를 뮤지컬 넘버 전곡으로 쓰고, 여기에 프랑스 대문호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소설 ‘페스트’를 각색해 스토리를 입혔다. 기술과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 첨단도시 ‘오랑시티’에 또 다시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벌어지는 혼돈을 그렸다.

감히(?) 서태지의 명곡들에 ‘칼’을 댄 이가 있다. ‘페스트’의 음악감독 김성수(47).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마, 돈 크라이’ 등을 통해 뮤지컬 음악감독으로서 독보적인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는 인물이다.

올해 한국 초연된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7월 24일, 광림아트센터 BBCH홀)’의 음악 역시 그의 손에서 새롭게 편곡됐다. ‘에드거…’는 뮤지컬 ‘겜블러’, ‘댄싱 섀도우’의 작곡가이자, 알란파슨스프로젝트의 ‘아이 인 더 스카이(Eye in the Sky)’ 같은 명곡을 탄생시킨 에릭 울프슨의 유작이다.

‘대가’들의 음악에 겁 없이 덤빈 김성수 감독을 지난 10일 광림아트센터에서 만났다. 김 감독은 원곡 두어 곡 편곡한 것으로 원곡자인 서태지로부터 수정없이 ‘오케이’ 사인을 받아 낸 장본인이다. 서태지컴퍼니에서 한 번에 오케이를 낸 건 그가 처음이었다고. ‘페스트’가 뮤지컬이 되기까지, 지난 3년여동안 난항을 겪으며 스태프도 대본도 바뀌었지만, 음악 감독만큼은 그대로였다. 

뮤지컬‘ 페스트’

김 감독은 독학으로 음악을 시작한 케이스다. 초등학교 때부터 레드 제플린, 찰리 파커에 심취했고, 고등학교 시절 록밴드 기타리스트를 거쳤다. 부모님의 반대로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에야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목욕탕 청소에 고구마 장사같은 부업도 당연히 했다. 이후 실용음악계 엘리트 코스로 꼽히는 미국 뮤지션스인스티튜트(MI)로 유학, 세계적인 재즈 기타리스트 스캇 헨더슨으로부터 사사받기도 했다.

“서태지 키드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간 세대”라는 김 감독이 기억하는 1990년대 서태지는 이른바 ‘난 놈’이었다.

“그땐 다들 밴드나 헤비메탈을 할 때였고, 발라드 아니면 트로트가 전부였어요. 그런데 ‘난 알아요’에 이어 ‘하여가’가 나오면서 생각했죠. 아…. 내가 먼저 (저런 걸) 하려고 했는데.”

서태지에 대해 ‘문화 대통령’ 같은 수식어엔 동의하지 않지만, 그를 ‘한국 최고의 뮤지션’으로 꼽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나오기 힘든 뮤지션이죠. 저도 ‘검정치마’ 같은 뮤지션들의 프로듀서를 해 봤지만, 서태지는 자신의 음악을 스스로 프로듀싱했잖아요. 게다가 춤까지. 이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전략적으로 똑똑하고. 만약 서태지가 밴드로 나왔다면 우리나라 음악사에 이런 변화는 없었을 거예요.”

에드거 앨런 포에 에릭 울프슨, 알베르 카뮈에 서태지까지. 명곡, 명작들을 재해석하는 일은 잘 하면 본전, 못 하면 비난이 쏟아질 게 자명한 일. 김 감독은 되레 쿨한 반응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에드거 앨런 포 책을 많이 읽었어요. 특히 ‘갈가마귀’는 쓰기 힘든 곡이었죠. 시 자체가 너무 무서웠거든요. 서태지 곡도 마찬가지였어요. 원작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새로워야 했죠. 그런데 압박을 느낀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원작에 대한 존중(Respect)도 있어야 하지만, 때론 그걸 또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켜야 하는 게 편곡자로서 우리 일이니까, 자신감도 필요하죠.”

다행히 원작자 서태지는 노래 선곡은 물론 편곡까지 오롯이 ‘페스트’ 크리에이티브 팀에 일임했다고.

“현명한 것 같아요. 본인 작품이라 쉽지 않았을텐데 제작진을 신뢰하더라고요. 큰 이견도 없었고요. 그 역시 창작자니까, 창작자들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잘 아는 거죠.”

익숙한 멜로디, 가사 때문에 원곡과 편곡 사이 타협점을 찾기 힘들었을 법도 한데, 김 감독은 “원곡을 듣고 싶으면 콘서트를 보러 가면 된다”는 명쾌한 답을 내 놨다.

“원곡과 너무 비슷하면 실망할 걸요. 어느 지점 쯤에서는 ‘서태지스러움’이 불쑥불쑥 나올 거예요. 또 어떤 곡은 서태지 노래인가 싶을 만큼 해체시킬 거고요. 넘버 리스트에 빠져 있는 곡들을 다양한 형태로 만나볼 수 있을 거예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설명을 너무 많이 해 주나(웃음).”

음악과 스토리 간 연결고리가 약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에는 “주크박스 뮤지컬의 숙명”이라며 “편곡의 묘미를 최대한 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서태지 음악이 어떻게 뮤지컬로 부활할지 미리 알려달라는 요청에 김 감독이 내 놓은 몇가지 팁.

“‘시대유감’이란 곡은 원래 신나잖아요. 그런데 뮤지컬에서는 어두워질 거예요. 또 웅장한 서곡(Overtue)이 있을 거고요. 물론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들이 나올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건 완전 비밀인데, 퇴장 음악에서도 좀 더 재밌는 편곡이 있을 거예요.”

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