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쿤스트할레, LA현대미술관 등 세계 유수 미술관전시 빼곡
[바젤(스위스 글ㆍ사진)=김아미 기자] “이 쪽이 더 밝고 잘 보이는데 사람들이 안 다녀. 이래서 내가 전시장에 오면 안돼. 트집잡고 싶은 게 자꾸 생겨.”
까다롭기로 소문난 설치미술가 양혜규(45)는 작품 설치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카메라 앞에서 웃으며 투덜거렸다.
양혜규 작가가 ‘2016 아트바젤’ 언리미티드(Unlimited)전에 자신의 블라인드 연작 ‘솔르윗 뒤집기(Sol LeWitt Upside Down)’를 선보였다. 미국 럭셔리 잡지 ‘롭리포트(Robbreport)’는 그의 작품을 올해 아트바젤에서 가장 기대되는 10개 전시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양혜규 작가가 ‘2016 아트바젤’ 언리미티드 전에 출품한 자신의 작품 ‘솔르윗 뒤집기’ 앞에 섰다. |
14일(현지시각) 스위스 바젤에서 양혜규 작가를 만났다. 언리미티드 출품작을 본 미술계 인사들의 반응을 묻자 “나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뷰티풀(Beautiful)이라고 하지. 그런데 난 절대 안 믿지”라며 예의 까칠한(?) 웃음을 보였다.
양혜규는 현재 세계 무대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는 한국의 젊은 작가다. 특히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로부터 잇달아 러브콜을 받고 있다. 작가로서 최고의 전성기이자,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아트바젤의 하이라이트 전시인 언리미티드전 출품을 비롯해, 오는 22일부터 12월 18일까지 6개월 동안 포르투갈 포르투 세할베스(Serralves) 현대미술관 야외 공간에서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또 7월 5일부터 9월 5일까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2019년 3월에는 미국 LA 현대미술관(MOCA) 전시를 앞두고 있다. 한 작가를 집중 소개하는 서베이 쇼(Survey show) 성격이다.
양혜규의 ‘솔 르윗 뒤집기 – 23 배로 확장 후 셋으로 나뉜,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 2016 아트 바젤 ‘언리미티드’ 설치전경. [사진제공=국제갤러리] |
앞서 지난 4월에는 독일 함부르크 소재 근현대미술관인 쿤스트할레에서 1년간 계속되는 개인전을 시작했다. 지난해 2월에는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세미 회고전 성격의 대규모 개인전을, 7월에는 중국 베이징 울렌스 현대미술관(UCCA)에서 잇달아 개인전을 열었다.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선보인 작품 3점을 각각 미국 카네기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했는데, 지난해 구겐하임과 모마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각각 같은 시기 소장품 전시에서 그의 작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작가가 일부러 미술관 전시만 고르는 건 아니다. 2년에 한번씩은 화랑 개인전을 연다. 지난해 뉴욕 전속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퐁피두 전시보다 더 오래 준비했던 것”이라고.
양혜규는 “늘 작품이 준비돼 있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 “잘 나가는 작가”라는 수식어와 함께 시샘도 따라 붙는다.
“독일에 ‘소매를 털면 나온다’는 말이 있어요. 뭔가를 쉽게 한다는 뜻인데, 쉽게 하는 게 좋은 건 아니에요. ‘말하는 미술’이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서도 보면 젊은 작가들보다 연륜이 있는 작가들이 늘 준비도 철저히 오시더라고요. 준비된 작가들이죠. 소매를 털어 금은보화가 나오는 줄 알지만 오산이에요.”
양혜규는 작품 뿐만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것, 하고 싶은 말이 언제나 ‘준비된 작가’다. 스스로를 “감정기복이 심한 성격(Moody)”이라고 했지만, 그의 작업과 ‘언어’는 철저하게 학구적이고 이성적이다. 언제나 ‘날’이 시퍼렇게 벼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가 밀려든다고 허덕이며 작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예전에 했던 작업이라도 “끝장을 보지 못한 게 있으면” 다시 새롭게 벼려 전시에 내 놓는다.
또 화랑보다 미술관 같은 기관에 더 좋은 작품을 내놓으려는 욕심도 없다. 작가는 “한 전시가 해결이 안 되면 바로 뒤에 있는 걸 갖다 붙인다”고 했다. 기관에 내놓을 작품이라도 지금 당장 실험해봐야 하는 게 있으면 상업화랑 전시에 앞당겨 내놓기도 한다는 뜻이다. 전시에 작업을 맞추기보다 작업을 전시에 배분하는 식이다.
양혜규의 작업들은 하나의 명쾌한 맥락(Context)로 읽히지 않는다. 극도로 모던하고 미니멀한 작업(블라인드 연작 ‘솔르윗 뒤집기’)인 듯 싶다가도, 원시적이고 목가적인 작업(짚풀 조각 ‘중간 유형’)이 튀어 나온다.
한 작업 안에서도 트릭(Trick)이 많다. 성체처럼 견고한 블라인드 군집 구조물에는 구겨지기 쉬운 재료의 연약함이 공존하고, 짚풀을 엮어 만든 구조물은 진짜 자연에서 얻은 지푸라기가 아닌, 비닐로 된 재료를 쓴다. 자연와 인공이 뒤섞인다.
작업의 결과물은 모호한(Ambiguous) 듯 보이지만 명확하고 양가적(Ambivalent)다. 세계 미술계가 현대미술가 양혜규를 주목하는 지점 중 하나다.
포르투 세할베스 공원 내 전시 시뮬레이션 이미지 [사진제공=국제갤러리] |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서사적으로, 혹은 계몽적으로 설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는 되레 “이미 말을 했는데 또 하라는 것 같다”며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내가 내 본업을 하지 않은건가 생각이 든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에게 작가의 역할은 관람객에게 ‘맞닥드리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 뿐.
“제가 쉬운 작업을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것 같아요.”
올해 언리미티드 전에 내놓은 작품은 최근 ‘솔르윗 뒤집기’라는 타이틀로 선보이고 있는 시리즈 중 하나다. 미국 미니멀리즘 거장 솔 르윗(1928-2007)의 이름을 땄다. 공교롭게도 이번 언리미티드 전시에는 솔르윗 작품 2점이 함께 나와 있다.
왜 하필 솔르윗일까. 주관과 작업 철학이 뚜렷한 작가가 유명 작가를 차용(Appopriation)하는 게 오히려 스스로를 ‘한계’에 가두는 건 아닐까.
작가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런 건 괜찮다”고 웃으며, “솔 르윗의 작품 세계에서 무한한 해방감(Liberation)을 느꼈다”고 말했다. 재료나 주제가 특정한 영역에 갇히지 않는 자유에서 오는 해방감. 그러니까 ‘솔르윗 뒤집기’는 솔 르윗 패러디라기보다 존경이나 오마주에 가깝다.
잇단 전시 일정으로 그야말로 “숨가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그는 오히려 “하면 하고 말면 말지”라며 “일을 더 벌이고 싶은 욕심같은 건 없다”고 담담해했다.
“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쇼를 해 보자. 그게 작년 리움과 베이징이었어요. 그걸 하고 나니 뭘 더 해야겠다는 발악같은 게 없어졌어요. 그래도 일이 너무 많으니까. 굶주린 사자처럼 왔다갔다, 매일 냄비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 해요. 아아…. 다들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아.(웃음)”
‘미쳐 돌아가는 듯’한 여정도 2019년을 기점으로 한 템포 낮출 예정이다. 또 다른 도약을 위해서다.
“2019년 LA 전시를 기점으로 클로징(Closing)을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큰 포켓(Pocket)들이 필요한 시기인데, 1~2년 준비로는 안 되니까. 비워야 새로운 걸 찾을 여지가 생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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