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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 칼럼] 비웃음과 웃음 사이에서 -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억장이 무너져요. 부모로서의 말의 권위가 전혀 서지 않아요.”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고민들 중의 하나가 부모가 자녀에게 말의 권위가 전혀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녀가 삐딱하거나 반발하고 대들 때면, 부모는 억장만큼 높게 쌓은 성(億丈之城, 1장은 3미터)이 허물어질 때처럼 허탈감과 슬픔을 느낀다고 한다. 과거에는 성이 무너지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간관계에서 말을 가장 잘 듣는 것은 상하관계에서이다. 나라의 대통령으로부터 그 아래로 혹은 회사의 회장으로부터 그 아래로 전해지는 말이 그래도 강력한 편이다. 짐승도 마찬가지여서, 아드리(ardry)가 일본원숭이에게 새로운 먹이를 길들이는 실험을 했을 때도 서열이 낮은 원숭이부터 주면 보급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지만 대장부터 새 음식을 주니 짧은 기간에 전체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권력이 권위처럼 작용해서 진짜 말의 권위라고 볼 수 없다.

말의 권위로 따지면, 말씀으로 전 세계와 인류를 창조한 하나님이 최고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을 듣고도 속으로 웃었던 여인이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수많은 민족의 어머니가 되도록 아들을 주겠다고 축복할 때에, 89세가 되도록 아이를 갖기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경수가 끊어진 사라가 부지불식간에 속으로 웃은 것이다. 하나님이 사라의 나쁜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축복의 말을 했음에도 비웃음을 사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도 인간에게 비웃음을 살 때가 있는데, 인간 사이에서 오죽하랴. 더구나 우리가 흔히 말의 권위를 확인하려할 때는 상대방의 나쁜 점이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하고 싶을 때이다. 대화법 차원에서 보면, 상대방의 좋은 점을 곧잘 알려주었던 사람이거나 그의 어려움에 배려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어쩌다가 나쁜 말도 먹혀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의 권위는 이런 대화법 차원을 넘어서는 듯하다.

말의 권위는 누가 어떻게 세우는 것일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90세의 사라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사라는 기쁨에 넘쳐 예언대로 아이의 이름을 ‘이삭’이라 부른다. ‘웃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웃게 하시고 듣는 자가 함께 웃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로 ‘이삭’은 비웃음과 웃음이라는 두 개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말씀이 실제와 일치하자 비로소 비웃음에서 웃음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자식이 더 이상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사라처럼 말이다. 결국 말의 권위는 말하는 자의 말과 행동의 일체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다. 타인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고통스러워하지만, 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니 타인도 내 말을 믿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더 많기 때문일 수도 있다. 타인보다 내가 내 말의 권위를 이미 무너뜨린 것이다. 억장만큼이나 높은 성(城)은 권위가 아니라 권위의식이 세운 것일 수도 있다. 진짜 말의 권위는 시간이 흘러도 타인이 그 말로 인해 웃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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