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리더스카페]임금이 두려워한 사관의 붓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압구정동의 유래가 된 정자 압구정은 풍광이 좋기로 중국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 한명회가 정자 이름과 기문을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에게서 직접 받아와 풍광이 가장 좋은 곳에 지은 것이다. 절경을 자랑했던 그 곳이 지금은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서만 존재한다. 사연은 이렇다.

성종 12년, 명나라에서 사신 정동이 왔다. 정동은 조선 출신의 악명높은 환관이었는데 한명회와 친밀한 사이였다. 정동은 압구정에 가고자 했으나 성종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만류했다. 그런데 정작 정동이 몸이 아파 취소하려 했다. 이에 한명회는 정동을 설득하고 성종에게는 정자가 좁으니 대궐에서 쓰는 큰 차일을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성종은 못마땅해하며 연회를 왕실 소유 정자인 제천정에서 열도록 지시했다. 성종이 노골적으로 막자 마음이 상한 한명회는 아내의 병을 핑계로 연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면전에서 임금을 무시한 태도에 성종은 진노했다. 한강 가에 있는 정자 중 제천정과 희우정을 제외하고 모든 정자를 헐어버리라고 명한다. 그 자리에 있던 승지들도 바로 한명회를 탄핵했다.

이 상황을 기록한 사관은 이에 어떤 평가를 했을까.

“전에 한명회가 연경에 갈 때에 주상이 당부하기를, ‘혹시라도 정동에게 먼저 연락하지 말고 활과 화살도 바치지 말라’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통주에 도착하자마자 통역관을 시켜 정동에게 먼저 연락했고, 부사 이승소가 말렸지만 듣지 않고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고 활과 화살도 바쳤다.”

성종과 한명회가 압구정을 놓고 대립하게 된 이면에는 그동안 한명회가 왕명을 무시하고 환관 정동에게 빌붙어 권력을 농단한 데 대한 성종의 불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필/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엮음, 이부록 그림/한국고전번역원 펴냄

기록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우리의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은 그 규모의 방대함이 우선 눈길을 끌지만 진정한 가치는 기록정신에 있다. 바로 임금도 두려워했던 사필(史筆)이다. 사필은 사관의 붓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신왈’(史臣曰) 로 시작되는 부분이 바로 사신의 주관적 논평, 사론(史論)으로 이야말로 조선왕조실록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역사의 눈’이기 때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이 사론을 모은 ‘사필-사론으로 본 조선왕조실록’을 펴냈다. 책은 실록 속 다양한 사안을 논평한 사론들을 모았으며, 사관과 실록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사론은 인물평부터 임금과 신료의 잘잘못, 사건 제도 등 당대 사회모습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성종 12년 5월 25일에는 병조참지 김세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전교를 내린 일이 있었다. 무사 출신이 기용된데 여론이 나빴다. 그로부터 약 보름 뒤, 중국 사신을 따라 온 광대들의 공연을 세자가 보고 싶어하자 승지들이 반대해 세자는 공연을 보지 못했다. 이에 사관의 붓은 김세적을 겨냥한다.

“승지들이 회의할 때 김세적은 머리를 푹 숙이고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김세적은 무사이니 세자를 지키고 키우는 올바른 길을 어떻게 알겠는가? 무릇 승지의 자리는 적합한 사람을 잘 선택하여 제수해야 한다.”

성종은 문무일체를 인사원칙으로 삼고 주요직책과 승지 자리에 무신들을 앉혔다. 취지는 나쁘지 않았지만 정작 무신들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비난을 받았다.

나라의 재정인 세금을 거두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공정하지 않으면 인심을 잃게 마련이다. 숙종 34년 강원도 관찰사로서 토지 조사 임무인 양전의 책임을 맡았던 송정규가 탄핵을 당했다. 5가지 농지 측량 기준을 무시하고 별도의 방식을 만들어 적용하는 바람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책임을 고을 수령 등에게 떠넘기고백성들의 살림이 거덜날 정도로 접대를 받는게 이유였다.

이에 사관은 “해마다 기근이 들어 민심이 동요하기 쉬운 상황이다 보니, 감히 백성의 원성에도 개의치 않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가 없었다. 너그럽고 충직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 일을 맡겨도 백성의 원망을 사지 않기가 어려운 상항인데 송정규처럼 괴팍하고 모진 사람이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백성이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일을 망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썼다.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선조에 대한 실망, 숙종의 어진화가이자 노론의 영수인 영의정 김창집의 초상화를 그렸던 화원 진재해가 노론의 참살을 부른 신임사화의 주인공 목호룡의 초상화 그리기를 거부한 사건과 관련한 논평, 조선의 씽크홀 사태랄 대동강변 큰길이 꺼진 재해를 조정의 잘못으로 해석한 논평 등 흥미로운 대목들도 많다.

/mee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