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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담아미의 문화쌀롱] ‘플라스틱 연금술사’ 최정화의 아뜰리에를 가다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현대미술가 최정화(55)의 아뜰리에에는 ‘신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작가가 작업실(작가는 헤드쿼터, R&D센터라고 말했다)로 쓰고 있는 서울 종로구 연지동 철물골목 오래된 양옥집 안마당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녹색 식물들로 가득하다. 5년 된 덩굴나무는 벽면을 타고 옥상까지 이어졌고, 사람 손바닥보다 이파리가 더 큰 알로카시아 화분이 작업실 천정까지 닿아 있다. 크고 작은 장독들은 죄다 뒤집어진 채 원 모양으로 도열해 있고, 지하 어둑한 공간에는 모양이 다른 플라스틱 의자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다. 마치 주술의 의미를 지닌 제단처럼.

작업실 구석구석 ‘작품’과 ‘잡동사니’의 경계가 모호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 작업실 입구에는 빨강, 노랑, 파랑 슬리퍼 10여개가 질서없이 흐트러져 있고, 한쪽 방 바닥에는 플라스틱 빗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냉장고 위에는 수십년도 더 됐을 꽃무늬 마호병(보온병)들이 옹기종기 살을 맞대고 있다. 

최정화 작가가 화단 장독대 사이에서 포즈를 취했다. 작가는 원 모양으로 늘어놓은 장독대들 사이로 “우주의 기를 모은다”고 말했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명품’과 ‘짝퉁’도 혼재해 있다. 루이비통 원단으로 직접 만든 보료 스타일의 소파는 진짜 ‘루이비통’인지 아닌지를 구분 지으려는 시도를 무색케 만든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의도하지 않고 놓여진 것은 없다. 일상의 모든 것은 놓여진 공간에서 서로가 서로와 관계를 맺고 있고, 그 '관계맺음'을 통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빛깔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우리 일상에 버릴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작가의 말대로다. 일상이 예술이고 예술이 일상이다. 


최정화의 작업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최정화의 작업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한국의 가장 핫한 현대미술가 최정화=최정화는 ‘플라스틱 연금술사’로 불린다. 싸구려 플라스틱을 이용한 설치작품을 주로 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플라스틱 바구니를 층층이 쌓은 기둥으로 옛 서울역 광장 앞을 밝혔다.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붉은 색 꽃다발 모양의 대형 설치물 ‘장밋빛 인생’도 그의 작품이다. 미술관 1층, 관람객들에게 ‘낮잠 의자’로 유명한 ‘황금 소파’가 실은 최정화의 작품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 한남동 리움 미술관 입구 검은색 플라스틱 기둥도 최정화 작품 ‘세기의 선물’이다.

최정화는 가장 핫한 한국의 현대미술가다. 많은 해외 컬렉터, 미술관 관계자들이 ‘좋아하는 한국 작가’로 주저없이 최정화를 꼽는다.

그의 작품은 전세계 곳곳에 있다. 전시를 여는 곳마다 그의 작품을 컬렉션한다. 핀란드 헬싱키에 소재한 키아스마(Kiasma)현대미술관, 이탈리아 로마의 국립현대미술관 맥시(MAXXI), 호주 브리즈번 현대미술관 고마(GoMA) 등 전시를 연 세계 유수 미술관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다. 일본은 각 현마다 최정화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의 필모그라피는 미술 이 외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넘나들어 왔다. 2014년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단장과 ‘불쌍’이라는 작품으로 협업했고, 그보다 훨씬 앞서 영화 쪽에서도 이름을 올렸다. ‘복수는 나의 것’. ‘성냥팔이 소녀’, ‘홀리데이인서울’, ‘모텔선인장’. ‘301 302’ 등 영화 미술을 맡기도 했다. 특히 ‘301 302’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영화의 영역에 미술을 끌어들인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인테리어, 디자인, 건축설계 분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활동해 오고 있다. 

최정화의 작업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최정화의 작업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최정화 작가는 오는 8월 열리는 ‘헬싱키 페스티벌’의 아트나잇을 직접 디렉팅한다. 비슷한 시기 패션잡지 보그가 주최하는 ‘한국패션 100년’ 기념 행사에도 그의 작품이 설치될 예정이다. 9월 일본 사이타마현과 이바라키현에서 새로 열리는 트리엔날레도 준비중이다. 최근에는 미국 보스턴미술관에서 사상 최대 규모로 열린 현대미술 그룹전에도 참여했다.

최정화 작가에 대해 “한국의 제프 쿤스”라는 평도 있다. 양가적인 의미다. “예술은 사기”라고 했던 백남준의 말을 되새겨보면 이해할 수 있다. 플라스틱 따위로 작품을 만든다는 뜻이고, 또 그만큼 잘 나가는 유명 작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싸구려 플라스틱은 왜 현대미술의 최전방으로 나오게 됐을까. 최정화는 정말 한국의 제프 쿤스일까.

▶일상과 예술에 대하여=“이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버려져 있던 것들이에요. 부표로 쓰던 것들이죠. 부서지고 깨졌지만 실제 유물이죠. 저건 아프리카에서 사람이 죽을 때 같이 묻어줬던 목베개고요.”

최정화 작가의 작업실에는 전세계 각지에서 모은 수집품들이 가득했다. 때 묻은 일본산 탱탱볼 세트부터 병따개까지, 일반 가정에서라면 얼마 후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만한 것들이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작업실의 신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일상이 고고학”이라고 했다. 탱탱볼 세트에서는 “우주가 보인다”고 말했다.

“씨앗과 열매는 불일불이(不一不二).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에요. 열매를 맺으려면 씨앗이 죽어야하고, 열매가 죽어야 씨앗이 되죠. 순환이 되며 하나의 원을 만드는 거예요. 일상과 예술의 관계도 같아요. 매 순간 순간 일상의 모든 것이 고고학적 유물이 되요. 예술의 연금술을 위한 것들이죠.”

그에게 일상은 예술이고 예술은 일상이었다. 나무로 쌓은 비싼 조각 작품은 파티가 벌어질 땐 하나씩 분리해 소파테이블로 쓴다고 했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제 작품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어요. 디지털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다 마음대로 해석되잖아요. 제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예술의 답은 수억만가지인데, 어느 때, 어느 공간에서,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다 다르죠.”

스스로를 은둔형도, 사교형도 아닌 “점재(점으로 존재)하는 중심”이라며, 어눌한 듯한 말투로 자신의 작업 철학을 명쾌하게 전달하는 그는 혹시 ‘천재과’는 아닐까. 아니나다를까 천재들만의 영역(?)인 ‘백지 답안지’를 그 역시 학창시절 내던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건이 그를 미술가의 길로 이끌었다.

“아이큐요? 80이 넘은 적이 없었어요. 하기 싫어서 대충했거든요. 고2 말때 쯤이었나. 수학시험에 백지를 냈어요. 거기에 감독관의 얼굴을 그렸죠. 재미가 없어서요. 엄청 맞았어요. 그땐 막 때릴 때니까. 백지 답안지를 출석부에 붙여서 교무실까지 맞으면서 가고 있는데 지나가던 미술 선생님이 그게 뭐냐고 물으시는 거에요. 그리고 답안지를 보시고는 내가 데려가겠다 하셨죠. 그 때부터 미술하게 된 거에요.”

▶관계맺음에 대하여=플라스틱이라는 싸구려 소재가 현대미술의 현장에 나오게 된 데에는 그의 엄청난 수집벽이 있었다. 그는 수십년간 ‘일상의 유물’들을 수집했다. 작업실 내 수집품만으로 전시를 열어도 넘칠 정도다. 그리고 수집벽은 곧 소재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저는 물건을 모신다고 말해요. 제게 아이디어를 주고 제 생각을 발전시켜 주는, 저에게는 작은 물건들 하나하나가 사부님들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모았대요. 기억은 없지만 엄마 말씀이. 길 가다가도 단추나 옷을 주워서 집으로 가져오고. 심지어는 중학교 때 언제 어디를 가면 버스표랑 토큰 같은 게 많이 떨어져 있는지 알았을 정도예요. 그러다가 순금도 주었죠. 제가 물질의 세계는 좀 알아요(웃음). 작업을 위해서 모았다면 잘 안 됐을 거에요. 하지만 이게 생활이니까.”

작업실에 놓여진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관계맺음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현관문 앞에 놓여 있는 슬리퍼들이 이를 말해준다. 함께 있을 때 그 ‘싸구려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화엄사상이에요.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을 보세요. 그 물방울 하나 하나가 모여 투명한 샹들리에처럼 아름답게 빛나잖아요. 서로가 서로를 비춰서 전체가 만들어져요. 인간과 자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것들도 제 2의 자연이에요. 석유와 고무나무가 만나 플라스틱이 만들어진 것처럼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조화로우면 모든 것이 해결되죠.”

학창 시절 ‘문청(문학청년)’이었던 그는 지금도 책을 끼고 산다. 휴대전화는 아예 없다. “스마트폰이 없어서 책을 볼 수 있다”고.

그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인용했다.

“자세히 봐야 아름답고 오래봐야 사랑스러워요. 어느 것 하나 하찮은 게 없어요. 모든 건 연결돼 있죠. 그런데 우리는 그 연결을 보지 않고 칸막이를 치죠.”

그는 “인공적인 것을 무시하고 나쁘다고 할 게 아니라 받아들여 어떻게 쓰고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플라스틱 작품은 단순히 플라스틱이라는 ‘소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최정화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소재보다 생각에 집착한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기자에게 전해준 글귀 역시 시 한구절. 오규원의 ‘두두(頭頭)’라는 시다.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 사물 하나하나가 전부 도이고 진리입니다.”

ami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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