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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95. 악!천후…악몽같은 하산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24:오 세브레이로에서 트리아까스텔라까지 20.6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히터에 걸어둔 빨래를 걷는다. 어제 진흙길을 걷느라 만신창이가 되었던 운동화도 잘 말랐다. 현대적인 알베르게라 그런지 쾌적한 아침이다. 마른 빨래를 손에 들고 무심히 창 밖을 바라본다. 그런데 바깥 풍경은 실내와는 완전히 다르다. 밤새 내리던 눈이 새벽에는 비로 변해서 아침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좀체 그칠 것 같지 않은 비가 쉼 없이 쏟아져 내린다.



빗소리가 요란해서 먼저 나갈 채비가 끝난 순례자들도 성큼 나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분위기다. 영하는 아니지만 기온도 낮은데다 바람까지 거세다. 오리털 패딩을 꺼내 입고 그 위에 바람막이를 단단히 여민다. 배낭까지 메고 나서 그 위에 우비를 입고 스틱을 들고 출발한다. 이곳이 산의 정상이라 오늘은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일정이다.

용기를 내어 알베르게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떠다니는 빗방울들이 오세브레이로를 신비스럽게 감싸고 있다. 하얀 입김을 불어 대며 빗속의 오세브레이로를 떠난다. 라파바의 기도처럼, “나 자신에 이르는 자유”를 발견할 수 있을까? 산티아고가 가까워질수록 생각도 더 많아진다.

이미 눈과 비가 섞인 길은 반은 눈이고 반은 진흙이다. 또다시 운동화가 젖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새로운 문제가 도래한다. 나의 우비는 케이처럼 코트식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우의가 아니라, 망토처럼 뒤집어쓰는 간이용이다. 남미에서 스페인으로 떠나올 때 다른 여행자에게서 받은 작별 선물이어서 까미노에서 요긴하게 썼지만 돌풍과 폭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세찬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노란 우비가 펄럭거리는 사이로 빗물이 옷을 적신다.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은 차라리 견딜만한데 바람이 너무 세서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이런 비바람은 처음 맞아본다. 체구가 크지 않은 내가 방심하면 허술한 우비가 날개가 되어 휙 날아가 버릴 것 같다. 녹고 있는 눈 때문에 점점 더 추워진다. 걷기가 힘드니까 입에선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나온다. 우비 안으로 들어오는 빗물은 슬슬 바람막이를 적시고 그 안의 오리털 패딩도 눅눅해진다. 기능성 웨어라도 일정한 정도의 환경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된다. 우비가 변변치 않으니 빗물이 옷에 닿는 시간이 많고, 물에 지속적으로 닿으니 방수 기능도 약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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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달을 걸어오면서 눈도 보고 비도 맞고 운동화도 젖어 보았지만 오늘 날씨는 획기적인 경험이다. 하산하는 내내 바람이 길을 막고 비는 한 순간도 그치질 않는다. 그 기괴한 바람소리, 휘몰아치던 돌풍, 우비를 날리며 파고드는 거센 빗방울은 그렇게 걸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공감하기 힘들 것이다.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폭풍우 속의 길 건너편에 비바람을 뚫고 오세브레이로 방향을 향해 오르는 순례자가 보인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조형물이다. 온통 물방울뿐인 회색의 세상 속 순례자의 실루엣은 사투(?)를 벌이며 하산하고 있는 케이와 나를 웃게 만든다. “1270m 산 로케 언덕(Alto de San Roque)”이정표 위의 유령 같은 순례자 사진은 오늘의 베스트 포토로 남는다.

​그나마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니 추위는 덜 어지지만 평소에도 차가운 내 손은 너무나 시리다. 까미노에 장갑도 챙겨오지 않아 케이가 여분으로 가지고 온 헝겊 장갑을 빌려 끼고 다녔는데 이것 역시 버티지 못하고 젖어버린다. 걸으면서도 카메라를 매는 이유는, 걷고 있는 모든 길을 담아보고자 하는 나름의 의지이기도 했지만, 산로케언덕을 마지막으로 카메라도 배낭에 넣는다. 손이 너무 시려서 카메라를 들 수도 없을뿐더러, 카메라도 젖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프레임은 같은 장면, 회색빛 배경 속의 돌풍과 폭우뿐이다.



까미노 이정표를 따라 갈리시아의 산골 마을들을 차례로 들르며 내려간다. 신발이야 당연히 젖는 것이고 이제는 바지도 무릎까지 젖어온다. 그나마 모자를 써서 시야는 확보가 된다. 돌로 지어진 마을의 건물을 두리번거려 보지만 비를 피할 곳도 변변치 않다. 비수기에 악천후라 그런지 문을 연 바(Bar) 하나 없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천 년 전 그대로의 까미노라는 이 시골길에서 그 옛날 순례자의 고통을 재현하며 걷는 기분이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걸으며 폭풍우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다행히 빈 헛간이나 처마 밑을 찾게 되기도 한다. 몸이 더 젖을까봐 앉지는 못해도 다리는 쉬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 젖은 데다 춥고 배고픈 게 거지가 따로 없다.



어제 오세브레이로에 오르며 했던 생각이 하루도 못되어 적중한다. 모든 길을 걸은 것 같아도 내가 걷지 못한 많은 길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바로 체험한다. 급경사를 내려와야 해서 무릎이나 조심하자 싶었는데 이런 악천후를 만날 줄을 몰랐다. 같은 길 이어도 날씨에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 어제 화창했던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비를 맞으며 깨닫는다. 걷는 주체는 분명 나지만 날씨에 따라 풍경은 달라지고 생각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태양빛이 수채화를 그린다면 비는 수묵화를 그린다. 돌풍에 빗방울이 춤을 추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선 걷는 것 밖에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걷게 된다. 그게 최선이다.

젖어서 오래 쉬지도 못하고 걸은 데다 20km밖에 걷지 않아서 12시 조금 넘으니 목적지에 도착한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이 돼서야 빗방울이 잠잠해진다. 트리아까스텔라(Triacastela) 마을은 순례자들에 의지해 운영된다고 하더니, 역시 알베르게도 많고 큰 메르까도도 두 개나 있다. 빗속을 헤치고 하산한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주방을 쓸 수 있는 알베르게를 찾는 것이다.



방금 문을 연 것 같은, 역시나 4월 개장을 맞아 보수 중인 사설 알베르게에 등록을 한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계속 내부에 페인트 칠 작업 중인 알베르게에 순례자는 나와 케이 단 둘이다. 공사에 바쁜 주인은 순례자에게는 별 관심도 없다. 시험 가동해 놓은 라디에이터가 방마다 돌아간다. 덕분에 따뜻한 한 물에 샤워를 하고 여유 있게 빨래를 한다. 껴입은 옷이 모두 젖어서 걱정이다. 그것도 사람이 많으면 눈치 보이는데 이 알베르게에는 케이와 나 뿐이니 여기저기 라디에이터마다 마음껏 빨래를 널어놓고 젖은 신발도 말릴 수 있다.

아침에 빈속으로 나와서 그 폭풍우 속을 걸어 내려왔으니 에너지 소비가 엄청나서 그런지 거의 아사 직전이다. 남아있는 할 일은 메르까도에 가는 것이다. 먹을 것은 무엇이든 다 흡입할 태세다. 두 개의 메르까도를 섭렵하며 점심과 저녁 두 끼 분의 음식 재료를 산다. 점심은 케이가 파스타를 만들어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고 낄낄거리며 먹어치운다. 이것저것 할 일을 다해도 겨우 3시다.



회색빛 오후, 포근한 침대로 들어가 꿀맛 같은 낮잠 속으로 빠진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늘어졌던 몸이 생기를 되찾는다. 죽은 듯 숙면을 취하고 깨어나니 저녁 어스름이 깔려 있다. 딱히 할 일도 없는 순례자 둘은 아직 마르지 않은 빨래를 챙기고 다시 저녁을 요리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밥이 먹고 싶다고 밥을 짓고 야채를 볶아 숭늉과 볶음밥을 만든다. 오후 내내 알베르게 공사에 정신없던 알베르게 주인이 식당을 지나가며 또 밥을 먹느냐는 듯 힐끗 쳐다본다. 먹고 쉬는 게 이 오후의 최대의 책임이라도 되는 듯 열심히 먹고 쉰다.

두 번의 식사와 그 사이의 낮잠은 몸을 완전히 회복시킨다. 물에 젖어 쪼글거리던 피부는 보송보송해졌고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다.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남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마저 다 읽는다. 어느덧 책 속의 “나”와 조르바도 이별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자유인이라 여기는 “나”에게 조르바는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어진 끈을 오가는 것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 끈을 잘라야 자유인이 될 수 있다면서... 조르바는 늘 내 마음속을 간질이던 자유라는 단어 그 자체다. 조르바의 말은 가슴을 적시지 않는다. 너에게 자유는 무엇이냐고 심장을 쾅쾅 두드린다.

비가 내렸다 말다 반복하던 잿빛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거세진 비는 여간해서는 그칠 기세가 아니다. 낮잠과 과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은 길게 늘어진다. 생각해보면 길은 걷는 사람의 것이다. 같은 길도 사람마다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 같은 구간을 걷는 순례자들도 걷는 시간, 날씨, 계절, 만나는 사람에 따라 각자의 까미노는 다르게 완성된다. 돌풍과 폭우를 뚫고 내려왔는데 밤새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조르바의 폭풍우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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