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147일간의 세계여행] 88. 버스 타고 순례길…걷지 못한 길, 미련만 남아
-까미노 데 산티아고 +17: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레온까지 37.4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다른 날과 다름없이 6시쯤 일어난다. 퉁퉁 부은 발에 케이의 파스를 바르고 압박붕대를 칭칭 감아 봐도 아무래도 걷는 것은 무리다. 케이가 출발할 채비를 하는 동안 멍하니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새벽 공기를 가르고 걷는 것이 얼마나 상쾌한 일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짐을 싸는 케이가 부럽다. 어제 메르까도라도 열렸으면 아침이라도 준비해서 함께 먹고 케이를 보낼 텐데, 아침도 못 먹고 혼자 걸어야 할 케이가 안됐다. 혼자 떠나야 하는 케이도 기분이 묘할 것이다.



다른 순례자들보다 빨리 출발하는 케이를 배웅하러 함께 알베르게를 나선다. 새벽 산책이라고 생각하고 거리로 나간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거리는 어둡고 고요하다. 길 위에는 케이와 나뿐이다. 오늘 여정은 레온까지 37.5km, 긴 이동이다. 인사를 나누고 뒤돌아 사라져가는 케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어느 마을을 떠날 땐 나도 저런 뒷모습으로 걸어가겠구나 싶다. 까미노 위에서의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듯 아련해진다. 오후에 레온의 알베르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음에도, 그는 가고 나는 남는 상황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어느새 걷기에 완전히 매몰되어 순례자로서 걷는 하루하루는 현재의 일상이 되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 마을에서의 까페콘레체 한 잔, 케이와 내가 나눈 이야기, 혹은 침묵, 혼자 걸을 때의 단상, 하다못해 어제의 눈물까지 모두가 내딛는 발자국이 만든 것이다. 열심히 걸어도 8시간은 족히 걸릴 그 거리만큼 안타까워진다.

아직 미명이어서인지 서쪽 하늘엔 아직도 달이 걸려 있다. 케이가 가고 나서도 묘한 아침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게 된다. 케이에게 오늘은 뒤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혼자만의 까미노가 될 것이다. 내게 걷지 않는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



날이 밝고 알베르게의 다른 순례자들도 모두 떠난 후, 혼자 남아 짐을 싸고 침낭을 정리한다. 매일 아침이면 바쁘게 알베르게를 빠져 나갔는데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있자니 심심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하다. 8시쯤 되자 오스피탈레로가 출근한다. 그가 도미토리의 침대를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이불을 널고 있는 동안 일층 휴게실에서 책을 읽으며 버스시간을 기다린다.

오스피탈레로에게 일이 힘들겠다고 했더니 오늘은 사람이 다섯 명이라 괜찮다며 여름 시즌에 사람이 많을 땐 정말 힘들다고 푸념을 한다. 그 바쁜 와중에도 나를 위해 차와 설탕까지 내어 준다. 짐을 산티아고로 보내고 버스 타고 가라고 진지하게 충고하던 어제 모습 그대로 그는 진솔한 사람이다. 덕분에 스페인의 시골 아침을 풍경을 만끽하며 차를 마시면서 독서를 하는 호사(?)를 누린다.



버스가 오는 시각은 9시 30분이다. 오스피탈레로 말이, 버스는 거의 정확한 시간에 올 것이지만 여기가 스페인인 관계로 어쩌면 운전기사가 버스에서 내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출발할 지도 모른다며 웃는다. 걷지 못하는 순례자의 기분을 웃음으로 위로해주는 그가 정말 고맙다. 친절한 오스피탈레로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알베르게를 나선다. “부엔 까미노!”라는 그의 마지막 인사가 큰 응원이 된다.

페레그리노 조형물이 세워진 식당 앞에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아저씨 두 명이 식당 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 있다.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기다리라는 손짓을 해 준다. 하긴, 붕대로 감은 다리에 배낭에, 내 행색은 누가 봐도 레온으로 가는 순례자다. 다른 버스가 와서 엉덩이를 들썩이면 굳이 앉아 있으라고 손짓을 해주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 나누던 고마운 아저씨들 덕분에 레온으로 가는 미니버스에 제대로 올라탄다. 짐을 트렁크에 실어준 운전기사는 아까 오스피탈레로 말대로 식당으로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나와 운전대를 잡는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은 그저 기다리고 있다. 여유가 넘치는 스페인이 맞긴 하다.



미니버스라 사람은 많지 않다. 버스를 타고 가는 마음이, 안될 일을 하는 사람처럼 불편하다. 걷기를 소망하고 이 먼 나라에 왔는데 걷지 못하는 오늘이 당혹스럽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안타깝고 쓸쓸하게 보인다. 내 발로 땅을 딛고 걸으면서 내 것이 되는 시간과 온몸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풍경과는 달리, 버스에서는 시간은 그저 휘발유의 힘이고 바라보는 풍경은 그저 휙 지나가버리는 “창밖의 풍경”일 뿐이다. 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버스와 기차와 비행기를 탔는데, 버스의 속도가 불편하다니... 느림에 적응하고 걸음에 일상이다. 보름 동안 거의 500km를 걸었던 나는, 버스에 올라탄 내가 어색하다.

차창 밖에는 자동차 도로와 나란한 까미노용 오솔길도 보이고 까미노 표지가 눈에 띄기도 한다. 저기 어딘가를 땀 훔쳐내며 걷고 있을 케이에게 왠지 모르게 미안해진다. 그는 그의 길을 걸을 뿐임을 알면서도, 걷지 못해 불편한 내 마음은 미안함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해도 뜨기 전에 출발한 케이가 어느 마을에서 까페솔로 한 잔을 마셨을 시각, 버스는 벌써 레온(Leon)에 진입한다. 시내에 진입하는 것도 일사천리다. 걸어서 들어온다면 대도시의 시내에 들어오고서도 알베르게를 찾아 한참 더 걸어야 하는데 말이다. 자연스럽게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는 순례자들도 많은데, 선뜻 그러지 못하는 내가 유연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걷지 못하는 이 상황은 결코 편하지 않다.

어제의 내 발걸음으로 걸었다면 10시간은 걸렸을 거리인데, 버스를 타고 오는 시간은 단 30분이다. 버스 터미널에 내려 길을 묻는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 길안내를 받는다. 레온은 대도시여서 알베르게까지 가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중간에 할 일도 있고 시간도 많으니 발에 무리가 안 가도록 천천히 걷기로 한다.

은행에 들러 ATM에서 유로를 인출하고 현대적인 레온의 거리, 도시 생활자들의 바쁜 월요일을 느긋하게 걷는다. 길이 편하고 어제 오늘 발을 많이 쉬어서인지 걸을 만하다.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시티맵도 한 장 가지고 나와 레온 우체국을 찾아간다. 엽서를 부치던 시골마을 우체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크고 현대적인 우체국에서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린다. 덜어놓은 짐을 이곳에서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부치면 그곳에서 2주간 보관하게 된다. 짐은 산티아고에 입성하면 다시 찾게 될 것이다. 부피가 줄어드 배낭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깃털처럼 가벼워졌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

케이와 만나기로 약속해 놓은 수녀원 알베르게로 간다. 거의 다 와서 헤매긴 했지만 근처 교회에서 나오는 친절한 할머니들이 손까지 잡고 데려다 주셔서 쉽게 도착한다. 순례자 등록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열한 시, 너무 이르다. 중세 때에는 병원이라는 뜻의 오스피탈(hospital)이 병원과 순례자 숙소를 겸했다고 하더니, 이곳 도미토리는 마치 병상처럼 보인다. 게다가 수녀원 알베르게라 남녀가 따로 묵어야 한다.

유쾌한 오스피탈레로의 안내를 받아 여자 도미토리로 들어간다. 알베르게 들어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라 순례자가 나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떤 동양인 여자가 배시시 웃고 서 있다. 오스피탈레로는 같은 나라 사람 아니냐는 눈빛이다. 통성명을 해보니 한국인은 아니고 일본 사람이다. 포르투갈어를 전공하는 그녀의 이름은 하루까, 포르투갈의 코임브라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다고 한다.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이곳 레온에서 출발해서 2주 정도 걷는다고 하더니, 하루까가 그 경우다. 오늘 알베르게에서 자고 내일부터 걷는다고 한다. 붙임성이 많고 예쁜 아가씨라서 심심할 줄 알았던 오전이 후딱 지나간다.



오후가 되자 하루까는 점심을 먹고 산티아고 가이드북을 사온다고 시내로 나간다. 와이파이 되는 알베르게 주방에서 아이패드나 만지작거리던 나도 발에 무리가 가지 않는 걸음으로 천천히 시내를 돌아보기로 하고 나간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알베르게를 나가는 순간 마주친 노란 까미노 화살표를 거꾸로 따라가기로 한다. 거꾸로 따라가면 순례자가 레온의 어디를 보며 걷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라도 버스에서의 상실감을 상쇄해 보고 싶다. 도시답게 멋진 건물도 보고 사람들이 분주히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면서 걷는다.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뒤를 따라가기도 한다. 등이 굽었어도 빨간 스웨터에 치마를 곱게 입고 할아버지 손을 잡고 의지해 산책하는 할머니가 너무 예쁘다. 같이 늙어 갈 수 있다는 것, 나이 들어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결혼한 사람들의 특권이구나 싶다.

걷다 보니 시에스타 시간이 다가와 식료품점이나 약국은 문을 닫는 분위기다. 어느 지점에서 되돌아서 알베르게로 온다. 알베르게 주방에는 순례자가 몇 명 더 도착해있다. 가이드북 산다고 나갔던 하루까가 돌아와 다른 일본인 남자 순례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생장부터 걸어서 눈 쌓인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며 지금은 무릎이 많이 아파서 일본인 일행과 헤어져 버스를 타고 레온에 왔다고 한다. 이쯤 걸으면 부상자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케이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일도 없는 오후, 케이는 4시쯤 돼서 도착할 것으로 서로 예상을 해서 시간이 남는다. 침대로 들어가 다리를 올려놓고 책을 읽는다. 알베르게 주방에선 와이파이가 되지만 지하인 여자 도미토리에선 와이파이가 안돼서 그냥 누워서 책이나 읽게 된다. 사아군에서 그가 나를 기다려 준 것처럼 나도 여기서 그를 기다리고 싶어서 3시쯤 침대에서 일어난다.

밖으로 나가려고 알베르게 접수대를 힐끗 쳐다보는데 막 순례자 등록을 하고 있는 까만 머리카락의 뒤통수가 보인다. 케이다. 너무 반가워서 등짝을 친다. 케이는 다른 날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고 한다. 동트기 전에 헤어져서 여덟 시간 만에 만나는 건데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까미노에 익숙해지면서 물리적인 거리를 계산하는 기준이 걷는 시간이 된다. 8시간의 걸음이 얼마나 고된지 알기에 더 반가운 것이다. 아직 까미노 시작도 안 한 하루까는 까미노 첫날 론세스바예스에서의 내가 그랬듯 38km라는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지만 그가 먼 거리를 걸었다는 것은 안다며 놀라고 있다.

케이가 씻고 정리하길 기다려 시내로 나온다. 시에스타가 끝난 약국에 들어가 발목에 붙일 파스와 압박붕대도 하나 더 산다. 대도시의 오후는 식당 골목에는 테이블이 펴지고 저녁 장사를 준비하고 있다. 여느 대도시처럼 많은 사람들이 볼일을 보고 아이들은 장난을 치고 있다.



이곳에서 유명한 레온대성당으로 간다. 시내에는 고딕 양식의 화려한 대성당이 우뚝 서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에 못가보고 지나쳐서 레온 대성당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레온은 중세의 까미노에서도 병원과 성당, 수도원이 많은 중심도시였다고 한다. 13세기에 지어졌다는 대성당이니만큼 그 크기에 압도되고 성화나 장식물도 성스럽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섬세하고 화려해서 특별히 더 아름답다. 순례자가 되어 까미노를 걷거나, 순례자를 보살피던 사람들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세를 떠올린다. 종교적인 순례를 하는 사람들은 더 깊은 감명을 받을 것이다. 



대성당에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간다. 인터넷에서 알아낸 정보로 웍(Wok)이라는 중국음식 뷔페를 찾아간다. 이곳은 저렴하고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이 많은 체인점이다. 다리 아픈 나와 온종일 걸은 케이가 오랜만에 음식 욕심을 부려 본다. 푸짐한 저녁을 먹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는데, 자꾸만 길을 잃는다. 10시까지 들어가야 하는 수녀원 알베르게라서 걸음이 더욱 바쁘다. 깜깜해진 거리를 더듬어 10시 정각에 간신히 알베르게에 들어간다.

이미 불이 꺼진 여자 도미토리에는 어제 엘부르고에서 기도하시던 스페인 할머니와 며칠 만에 만나는 독일 여자 린다 등 아는 얼굴들이 도착해서 누워있다. 조심조심 움직여 씻고 침대에 누우니 아직 잠들지 않은 옆 침대의 하루까가 살며시 손을 흔든다.

버스로 지나온 길을 걸어오지 못한 것이 이렇게 안타깝고 불편한 하루가 있다니, 인생에 두고 두고 기억에 남을 하루다. 하루를 쉬었을 뿐인데도 발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복잡미묘했던 하루는 다 지나갔다. 내일부터는 감사하며 걸을 것이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