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쌀롱 인터뷰] 이 시대 가장 핫한 연출가, 고선웅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극작가 겸 고선웅(48ㆍ극단 마방진 대표)을 다시 만나기로 한 건 순전히 그가 ‘011’로 시작하는 2G폰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국립극단과 처음 협업한 작품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으로 대한민국연극대상, 동아연극상 대상ㆍ연출가상, 한국연극연출가협회 ‘올해의 연출가상’ 등 각종 연극상을 휩쓴 그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이었던 건 전화만 걸고 받아도 되는 전화기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남자, 참 행복하겠다.’

고선웅은 ‘이 시대 가장 핫한 연출가’로 꼽힌다. “대학로 배우들이 꼭 한번 작업하고 싶은 연출가(연극배우 전수환)”, “일정 잡기 힘든, 요즘 가장 바쁜 연출가(윤미경 국립극단 사무국장)”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올해 또 한번 핫한 작품을 내 놨다. 국립극단과 두번째로 협업한 ‘한국인의 초상’이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제목부터 어둡게 다가왔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초상이 맑은 빛 수채화는 아닐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다. 개막에 앞서 10일 국립극단 소극장판(서울 용산구 청파로)에서 만난 고선웅은 “헬조선이니 흙수저니 하는 말들을 가장 싫어한다”고 말했다. “헬조선이 싫으면 떠나는 게 맞다”는 이유다. 그는 “어렵고 고단하고 뼈아픈 현실을 얘기함으로써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긍정을 얘기하기 위해 부정을 얘기했다”는 것.

긍정을 위한 부정. 너무 뻔한 수사(修辭ㆍRetoric)는 아닐까. 16일 같은 장소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연극을 통해 현실을 ‘동어반복’한 연출가에게 “그래서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냐” 따져묻기 위해서였다.

2G폰을 쓰고, 15년 된 스타렉스를 타고 다니는, 고선웅 연출가와의 인터뷰는 봄 햇살 가득 내려 앉은 국립극단 안마당에서 이뤄졌다.

인터뷰이는 “봄바람은 자기 맘대로네”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로 흘렀다. 봄바람처럼, 자기 맘대로.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지난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어떤 작업이었나요.

▶특별히 더 많이 공들인 작품은 아니었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한 기억 밖엔 없죠. 연극이 갖고 있는 고전의 풍미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을 했는데 요즘 관객들이 그 부분에서 매력을 느낀 것 같습니다.

-이번 작품 ‘한국인의 초상’에 대해서 바로 이야기해보죠. 재밌게 만들려고 의도한 건가요.

▶이야기가 무거운데 그걸 유쾌하게 풀지 않으면 힘들어서 어떻게 보겠어요. 사실 그렇게 볼 필요도 없고요. 어차피 뉴스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이고, 그걸 무대 공간에서 재가공할 땐 새로운 접근을 할 수 밖에 없죠. 그래서 놀이 형식을 가져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C방에서 아이를 낳아 버리는 장면은 보기에 너무 힘들었어요.

▶저도 힘들어요. 저는 아이가 둘이거든요. 요즘 뉴스를 보면 아이를 때리고, 유기하고…. 가족이 와해되고 천륜이 뭉개지고 있는 거죠. 분명 엄청난 문제가 있는 건데, 저는 연극으로 보여주기만 할 뿐, 이런 문제가 생긴 이유가 뭐라고 이야기하진 않아요. 관객들이 연극을 보고 문제의식을 갖겠죠. 그런 다음에 각자의 역할을 찾는거고요.

-그렇다보니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가’ 의문이 생깁니다.

▶제가 원했던 게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거야. 뻔한 이야기를 왜 자꾸 보여주는거야…. 저는 세상 모든 이야기가 뻔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인연을 맺는거죠. 관객이 작품과 인연 맺음으로써 현실을 두 번 각인받는 것. 그러다 보면 분명 삶을 개선하거나, 선업을 쌓는 일들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극 중에서 강남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저는 돈암동에 살고 있어요. 강남은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동네예요. 강남에서 직장 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전혀 모르겠어요. (고선웅은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출신으로 1학년 때 대학 내 서클에서 처음으로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 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 AE, 이벤트 기획 등의 일을 하기도 했다) 분명한 건, 강남은 좀 달라요. 정리정돈 된 느낌. 제가 사는 동네랑은 다르죠. 그렇다고 강남이 싫은 건 전혀 아니예요. 다만 우리나라가 강남ㆍ북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고. 강남에 편입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 그러다보니 극 중에 ‘강남물’ 이야기가 나왔죠.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강남물’은 무엇을 상징하나요.

▶저도 좋은 형편에서 안착한 계층은 아니잖아요. 소위 ‘스테인리스 수저’랄까. 그렇다고 컴플렉스가 있는 것도 아니예요. 강남 부자에 대한 약간의 반감 같은 것? 스타트라인이 강북과는 다르다는 것? 강북은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하니까요. 이게 옛날보다 더 심해지고 있고요.

-제목이 너무 거창하진 않나요. 뭔가를 대변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은데.

▶저 혼자 그렸다면 부담됐겠죠. “네가 뭔데 한국인을 그려”라고 하실 수도 있고요. 그런데 여럿이 그렸잖아요. 없었던 일을 가공한 것도 아니고요. “우리가 그린 초상화는 이겁니다. 당신도 그려 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한국인의 초상’은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공동 창작한 작품이다)

-연출가의 체험과 가장 가까운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군대후유증’이요. 저는 욕을 스물 두살에 군대에서 배웠어요. 그 전까지는 그런 단어를 경멸했죠. 군대에서 편협함과 권위적인 생각이 만들어져요. 남성 지향적이고 폭력적이면서 여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것도 배우게 되고요. 군대 문화가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고 생각해요. (고선웅의 아버지는 육군 준위로 전역한 직업군인. 그는 16살까지 전국을 돌며 군 부대 근처에서 살았고, 스스로 군 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엔딩에선 왜 ‘해 봐야 한다’고 했나요. 이 때문에 무리하게 밝게 마무리한 느낌도 있습니다.

▶‘해(日)’의 의미도 있고 ‘하다’의 의미도 있는데, 저한테는 해가 중요해요. 세상엔 좋은 놈, 나쁜 놈 다 있는데 둘 다 해를 봐야 해요. 우리는 해를 안 보고살아요. 해가 뜨면 보지도 않고 “아, 해 떴어” 그래요. 그런데 농부들은 해를 봐요. 천기를 봐야하니까. 물의 흐름대로, 순리대로 사는 거죠. 그럼 죄를 덜 짓게 되요.

-긍정적인 성격인가 봅니다.

▶헬조선, 삼포세대, 이번 생애는 망했다 같은 한국사회의 패배의식이 가장 싫어요. “이런 거 못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게 좋단 말이죠.

-최근 한 기업가가 강연에서 “회사가 싫다면서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제일 싫다”고 한 적이 있어요. 연출가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직장이 싫으면 나가야죠.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고 말하는데, 그 먹고 사는 월급을 누가 주느냐 말이예요.

-열심히 노력해도 환경 때문에 좌절할 수 있지 않나요.

▶열심히 하면 공격 당해요. 열정은 불처럼 뜨거워서 남도 데이게 하고 나도 데이죠. 우린 모두 카오스 속에 살아요. 그렇기 때문에 원칙을 세우는 것에 대해 회의를 갖는 게 중요해요. 언제나 ‘무골호인(無骨好人)’처럼 살 수 있어요? 못 살아요.

-그렇다면 연출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건가요.

▶저라고 왜 안 그랬겠어요. 젊은 날에는 따지길 좋아했죠. 그런데 연극을 계속 하다보니 어느 한 순간에 “이게 아니었구나”라는 걸 안 거예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게 좋아요. 좋게 봐야 좋게 보이니까요. (그의 결론은 “장자를 보쇼” 였다) 제가 5~6년 전부터 줄곧 해 온 말이 ‘죽어도 긍정’입니다. 전 사랑과 긍정의 예찬론자예요. 세상에 사랑할 게 많아요. 그런데 나에게 너무 엄격하면 남을 사랑할 수 없어요. 나와 남은 똑같거든요. ‘남’이라는 글자는 ‘나’라는 글자 아래에 ‘(네모) 상자’를 둔 거잖아요. 남을 잘 보면 내가 보여요. 그래서 누군가를 ‘나쁘다’고 함부로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나쁜 놈을 보고 분노하는 것 역시 그 나쁜 놈에게서 내 모습이 보이기 때문인 거예요.

-고선웅의 연출 스타일은 어떤가요. 독불장군 같은 스타일은 아닌가요.

▶연극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자기가 무대에 서는 것도, 무대에 못질하는 것도, 의상에 바느질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면 배우들이 대사를 외고, 무대디자이너가 못질을 하고, 의상디자이너가 바느질을 하고 싶겠어요. 자꾸 긍정을 하면서 그들에게 보람을 느끼게 해 주는 게 연출가의 할 일이죠. 혼자 다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올해 예정된 작품이 많을 것 같은데

▶몇 개 있는데 저도 잘 몰라요. 전 눈 앞에 당면한 일들을 먼저 해요. 아무리 큰 프로젝트라도 심장이 먼저 움직여야 할 수 있고요. (오는 26일부터 고선웅의 17년전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이었던 ‘우울한 풍경속의 여자’가 아르코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스마트폰에 매몰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부럽습니다.

▶1994년부터 쓰던 휴대폰이예요. 배우들이 좀 불편해 하더라고요. 단톡방에 연출이 안 들어오니까. 그런데 전 싫더라고요. 아니 이게 뭐라고 말이죠.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세상은 스마트해졌고 나는 멍청해졌다”예요.

한편 한국인의 초상’은 15일동안 공연된다. 극단 측에 따르면 이미 모든 회차가 매진됐다. 120석 남짓인 소극장. 객석을 꽉꽉 채워봤자 2000명도 안 되는 관객이다. 고작(?) 2000명 정도의 공감대로 세상이 변화할 힘이 생길까. 어쨌거나 극단 측은 좌석 수를 조금 늘리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amigo@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