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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85. 790km 낯선 동행…순례길이 외롭지 않은 이유
-까미노 데 산티아고 +14:보아디야델까미노~까리온데로스콘데스 25.2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친절하고 유쾌한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데사유노까지 든든히 먹고 길을 나선다. 항아리만한 컵에 가득 따라주는 따뜻한 코코아와 빵을 집어들고 인사나누며 먹는 아침식사가 즐겁다. 어제 나의 천사였던 한국인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분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순례길이라 걷는 우리와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앞으로 물집을 치료할 때마다 그분이 생각나겠지만, 남은 순례길에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친절을 나눌 수 있다면 이 만남은 의미를 더하게 될 것이다.


곡물을 대서양까지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가 207km에 달하는 인공수로인 까스띠야 수로(Canal de Castilla)가 이곳 보아디야부터 이어진다. 그야말로 대운하다. 주변의 갈대, 나무와 물길이 어우러진 풍경에 경탄하며 케이와 발걸음을 맞춘다.

여행 중인 나는 남미에서, 케이는 한국에서 하루 차이로 마드리드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무슨 인연인지 처음 만난 케이와 나는 순례길의 동행이 되었다. 이렇게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하기도 하고 속도가 달라지면 각자의 길을 걷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마을쯤에서 기다리고 있는 케이를 만나 쉬기도 하고 함께 바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그저 스치는 인연이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대화가 잘 통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정치, 사회, 문화 같은 포괄적인 이야기부터 각자 지금 읽고 있는 책, 어제 만난 순례자, 때로는 까미노에서의 단상까지 화제도 풍부하다. 이렇게 “따로 또 같이” 걷는 까미노는 서로에게 홀로 걷는 자유를 만끽하게 하는 한편 동행의 존재가 든든하게도 느껴진다.


수로 옆에 갈대가 피어 마치 쓸쓸한 가을 저녁 같은 풍광을 완성한다. 길은 험하지도 않고 오르막이나 내리막도 없다. 어제 치료를 하고 붕대를 칭칭 감은 오른쪽 다리에 부담이 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걷는 사이, 어느새 수로의 갑문까지 왔다.

수로를 따라 6km를 걸어 프로미스타(Fromista)까지 온 것이다. 마을과 나무가 그대로 비치는 수로와 마을의 고요함, 차분히 걷고 있는 발걸음이 이 아침에 잘 어울린다. 두 달 전 남인도 포트코친에서의 수로유람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라 더 반갑다. 까미노에서의 아침의 첫걸음은 언제나 향긋하고 신선한 공기로 샤워하는 느낌이라 좋지만 오늘은 더욱 특별한 기분이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프로미스타를 빠져나오자 수로와는 멀어지고 길은 고속도로 옆으로 이어진다. 마을의 고즈넉함을 단박에 깨뜨리는 자동차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고속도로 위로 돌아가는 육교 위에서는 순례들을 위한 철제 조형물이 자동차들의 소음으로 상한 기분을 상쇄해준다. 그러나 이어지는 까미노는 도로를 따라 계속된다. 남은 코스에는 메세타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은 여기 뿐인 것 같다. 까미노 표지를 따라 작은 마을을 들락날락해도 결국 도로를 끼고 걷게 된다.


2주일 전, 론세스바예스에서 처음 걷기 시작할 때는 숲과 강, 들판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감동을 주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것들은 마치 일상의 배경같이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걷는 길은 각종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서 시끄러운 것은 물론, 지루하게 똑같은 풍경을 보고 가야하는, 도로 옆에 일부러 만들어 놓은 인공적인 길이다. 앞으로 남은 20km를 꼼짝없이 이 길로 가야 한다.


자잘한 돌을 깔아놓은 까미노 쪽은 발가락마다 물집이 잡히고 부어오른 발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등산화를 신은 케이는 그냥 이 자갈길로 가고 나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의 가장자리로 걷는다. 자동차가 지나가서 조금 위험하지만 이 도로는 자전거 순례자도 다니는 곳이라 조심해서 가면 괜찮을 것 같다. 배낭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한손에 쥐고는 음악을 틀어놓고 걷는다. 이렇게라도 해야 지루함이 상쇄될 것 같다.

잠시 쉼터에 앉아 다리를 쉬며 발 상태를 살핀다. 물집에서 흘러나온 진물이 두꺼운 등산양말을 적시고 있고, 어제까지 괜찮던 왼발에도 물집이 잡히고 있다. 발이 부어서 다시 붕대를 감고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는 것도 일이다. 간신히 신발에 발을 구겨놓고 일어서서 한 발짝 떼는 것은 더욱 어렵다. 다시는 쉬고 싶지도 않을 정도다.


어차피 지나가는 차 소리로 요란한 길, 뙤약볕 아래서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여행 중에 들으려고 아이패드에 담아온 노래들이 무작위로 흘러나온다. 가요가 나오면 따라서 흥얼거리고, 걸음과 어울리지 않는 “Kiss the rain” 같은 걸음에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도 들으면서 영혼없이 걷는다. 음악이 없었다면 차들의 소음을 핑계삼아 발의 고통에 더 집중하게 외었을 것이다. 그나마 음악이 약이 된 셈이다.

지루한 길이 계속되지만 아스팔트길로 걸을 수 있어서 어쨌든 발에 자극은 덜 주고 까리온데로스콘데스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은 예상보다 번화하다. 보통 작은 마을에선 사람 만나기도 힘든데 이곳은 사람도 많고 활기차다. 까미노에서는 중요한 곳이어서 중세에는 성당이 12개나 있었다고 한다. 걷다 보니 학교에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재잘거리며 뛰어노는 모습이 보인다. 속세를 등지고 수도원에 머물다 오랫만에 나온 사람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낯설게 들린다. 발이 아파서 한시가 급해 산타마리아 성당 알베르게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지금 내 모습이 진짜 “페리그리노”에 가까워져있음을 느끼게 된다.


문이 열린 알베르게에 오스피탈레로는 없다. 먼저 온 순례자들이 하는 대로 일단 침대 먼저 차지해서 짐을 푸는 중이다. 얼른 짐을 내려놓고 씻고 발의 물집을 치료하고 빨래도 하고 알베르게 안의 주방도 들러본다. 우리 뒤로 도착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탈리아 사람 루이스, 다니엘레 말고도 한국인 주와 금발의 영국인 아만다, 독일인 매기, 스페인 사람 빠꼬 등 반가운 얼굴들이 많다. 길에서 스치거나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인연으로 낯익은 얼굴들이다.

45km를 걸은 다음 날부터 30km 정도를 매일 걸어왔던 터라 겨우(?)25km 걸은 오늘은 도착시간도 빠른 편이이다. 점심도 거른 케이와 나는 장보기에 나선다. 스페인의 대형할인매장 “디아(Dia)”에는 없는 것이 없다. 며칠동안 시골의 구멍가게만 기웃거리다가 번화한 이곳에서 디아를 찾은 우리는 괜히 즐거워하며 장을 본다. 대형할인점은 시에스타도 없어서 좋다. 쌀과 야채를 사다가 볶음밥을 만들어 허기를 채운다. 요즘 케이와 나는 점심을 거르고 걷는 게 편해져서 저녁을 조금 일찍 먹게 된다.


이 알베르게는 오스피탈레로가 수녀님들이다. 영어 잘하는 예쁜 수녀님과 나이 들어 보이시는 푸근한 얼굴의 수녀님 두 분이다. 수녀님들이 오시고 나서야 순례자 등록을 마친다. 5시에 로비에서 작은 미팅이 있다고 해서 케이와 나는 내려가 보기로 한다. 알베르게에 순례자들은 많지만 5시에 거기 모인 사람은 케이와 나, 이라체에서 만난 독일 아저씨 둘과 역시 독일인인 린다, 자주 마주치던 스페인여자, 루이스 이렇게 일곱 명이 고작이다. 케이와 나를 빼면 다른 사람들은 카톨릭 신자다. 이 자리는 두 분 수녀님께서 이곳에 머무는 순례자를 위해 기도를 해주시는 자리다. 푸근한 인상의 나이든 수녀님이 스페인어로 말씀하시면 옆에 있는 예쁜 수녀님이 영어로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해주신다. 로비의 작은 소파에 모인 것뿐인데도 경건한 마음이 된다.

큰 수녀님이 일어나시더니 순례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각자 기도를 해주신다. 수녀님의 따뜻한 손이 내 이마에 닿고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의 기도가 머리위에서 울린다. 일곱 명의 순례자들 모두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이고 앉아 있다가 수녀님이 나누어 주시는 작은 별모양의 종이를 다들 소중하게 받아든다. 마음 깊은 곳이 뭉클해온다. 수녀님들이 고맙고 이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기도해 주시는 따뜻한 손길과 미소가 지친 순례자들의 마음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오후 7시에는 수녀님을 따라 작은 성당의 미사도 참석했다. 예쁜 수녀님의 안내를 받아 골목을 걸어 근처의 성당으로 간다. 붕대를 감고 뒤뚱거리며 걷는 나를 불러세워 병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수녀님이 걱정을 한다. 괜찮다고 대답하면서도 그녀의 말 한마디만으로도 아픈 발이 나을 것 같다.

여행지에서 관광용의 용도를 뺀다면, 자발적인 미사 참석은 성당에서 하던 친구의 결혼식 이후엔 처음이나 다름없다. 이미 미사가 시작된 성당에 들어가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미사는 복사도 성가대도 없이 노신부님 혼자 집전하신다. 신도들도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주위 사람과 인사를 나누라는 말에 옆에 앉으신 스페인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인사를 주고받는다. 주름진 얼굴에서 풍기는 미소가 손으로 전달된다. 표현할 수 없는 잔잔한 감동이 내 마음속에 퍼진다.

알베르게에 돌아오니 이제야 저녁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주방이 붐빈다. 와인을 들고 저녁을 권하는 사람들의 소란을 바라보며 케이와 맥주 한 캔을 마신다. 온종일 아픈 발을 살피며 걸어온 길의 끝에서 뜻밖의 위안을 받는다. 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분들과 그런 아름다운 분들이 믿는 저 크신 분의 사랑이 콧날을 시큰하게 한다. 남은 길, 어느 하늘 아래를 걷게 되어도 수녀님들이 기도가 발걸음을 지켜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종교가 없는 나에게, 기도의 울림은 오래도록 남는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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