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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들리는 대치동 신화] 밤 10시, 사교육 1번지 도로변이 썰렁해졌다
쉬운 수능·경기불황에 학원가 ‘찬바람’
늦은 밤 학부모 수입차 바글바글 ‘옛말’
잘 나가던 학원건물이 폐가 수준 전락
목동·중계동 학원밀집지도 위기감 확산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의 불패신화가 흔들리고 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과 양천구 목동, 노원구 중계동 ‘빅3’ 학원가는 높은 경쟁력을 바탕으로 각종 외부 변수에도 큰 부침이 없던 사교육 특구였다. 하지만 경기불황이 장기화하고 교육당국의 ‘쉬운 수능’ 기조가 이어지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이들 학원가에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풍경. 경기침체와 쉬운 수능, 학령인구 감소 등의 여파로 대치동과 목동, 중계동 등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의 ‘불패신화’가 흔들리고 있다.

새학기 개학을 1주일여 앞두고 기자가 돌아본 이들 학원가엔 긴장감과 위기감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학원과 학생들이 밀집한 곳임엔 틀림없지만 이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균열이 감지됐다.

24일 밤 9시30분. 기자가 탄 택시가 대치동 학원가에 진입하자 택시기사 조모(49)씨는 “예전에는 밤 10시 전후로 학생들을 태우러 온 차들로 바글바글해 꽉 막히는데 요즘에는 도로가 매우 한산해졌다”고 말했다. 도곡역과 대치역 사이 대로변에는 학원 버스 3대가 세워져 있고, 학생을 기다리는 듯 정차하고 있는 승용차 3~4대가 있었지만 도로는 한산했다.

▶학원, 옛날만큼 안 다닌다=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온 예비 고3 임모(18)양은 “최근에는 수능 영어가 쉽게 나오면서 굳이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미리 쌓은 실력으로 볼 수 있는 시험이라고 다들 생각한다. 실수만 안 하면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예비 고3 이모(18)양은 “학원을 다니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수능이 쉬워지다보니까 꼭 다녀야 하나 고민이 많이 된다. 친구들을 보면 학원을 안 다니는 애들도 적지 않다. 부족한 부분만 따로 과외하거나, 인터넷 강의만 보는 친구들이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도곡동에 사는 학부모 임모(46ㆍ여)씨는 “입시제도가 계속 바뀌는 게 불안하니까 학원 보내는거지 수능에서 등급만 맞추면 되는 요즘같은 추세에는 학원보다는 자습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송파구에서 자녀를 데리러 온 학부모 정모(47ㆍ여) 씨는 “단과 한 과목에 32만원인데 5개 다니면 160만원이다. 과외까지 보충하면 월 200만원 가까이가 학원비로 깨지는데, 요즘 경제 상황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 아이한테 ‘방학에도 꼭 다녀야겠냐’ 묻기도 했다”고 말했다.

▶“사교육 1번지, 우리마저”=대치동 학원가에는 위기감이 분명히 느껴졌다. 대치동에서 7년째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M보습학원 원장 강모(59)씨는 “대치동 학원이라고 해서 불황을 안 탄다는 말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강씨는 “학원 시작한 이래 요즘이 제일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겨울 방학 끝 무렵 새학기 준비 시즌인 지금은 성수기인데 예년과 비교해 학생수가 현저히 적다”고 털어놨다. 그는 “경제가 안 좋으니 다니던 학원 중에 1~2개라도 줄이는 경우가 많다. 우리 학원에서도 국영수사과 5과목 듣던 학생들 상당수가 국영수 3개만 듣도록 줄였다”고 토로했다.

대치동 P학원 원장 김모(52)씨는 “대치동은 학원마다 전문 분야라든지 틈새시장을 노려 학생들 요구를 다양하게 맞춰주는 편이다. 대형학원들은 기업처럼 움직이니까 그나마 버티는 것 같은데, 우리같은 중소 규모 학원들은 많이 힘들다”고 털어놨다.

학원가 인근 부동산의 공인중개사는 “요즘 학원이 잘 안되니까 팔고 나가려는 매물이 엄청 많다. 계속 학원 매물이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학원이 침체라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장사가 잘 안되는 학원은 권리금 같은 거 없어진 지 오래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예전 같으면 지금 시즌에 이 거리가 예비고3과 재수생들로 꽉꽉 찼다. 인근에 세들어 살면서 학원 다니는 학생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원룸도 텅 비었다”고 전했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2015년 한해 동안 강남ㆍ서초구 지역에서 문을 닫은 학원 및 교습소는 1191개로 서울 전 지역 중에서 가장 많았다. 이는 서울 전체에서 폐업한 학원ㆍ교습소(3238개)의 3분의 1이 넘는 비율이다.

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도로변 한산한 모습.

▶목동ㆍ중계동도 위기감=서울 목동 C플라자. 한 건물 안에 100여개 가까운 크고 작은 학원이 밀집해있는 목동 학원가의 상징인 이곳에서도 위기감이 감돌았다.

수능대비 전문 R학원 원장 이모씨는 “새학기 시작 전 이맘때면 수강생들이 많이 학원에 복귀해야 되는데 이 시기가 늦어지고 있다. 학생들이 아예 복귀하지 않아 문을 닫은 학원들도 많다”고 전했다. 이씨는 “이전의 불경기 때와 비교하더라도 지금이 아주 많이 더 힘든 편이다. 수강료가 4~5개월 밀리고 연락이 두절된 학생도 있다”며 “향후 2~3년이 학원가의 거대한 구조조정 시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같은 건물 N수학학원의 상담실장은 “영어가 쉬워지면 수학으로 수요가 이동하고, 수능이 쉬워지면 내신 대비를 잘하는 학원으로 학생들이 이동한다. 즉 전체 사교육 시장 규모는 쉽게 줄어들지 않는 것”이라며 “그럼에도 최근 목동마저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건 경기불황이 핵심적 요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강북지역의 사교육 메카인 노원구 중계동 은행사거리 학원가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M영어학원장 김모(59)씨는 “작년 겨울만 해도 새학기 앞둔 시점에 신입생 20명 정도가 들어왔었는데, 올해는 6~7명밖에 안 왔다”며 “5년 전만해도 이 근방에 다 학생들이었는데, 전셋값이 크게 오르면서 초중고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경기도로 많이 빠져나간 것도 침체의 원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S영어학원 주모씨는 “우리 건물에도 2014년 가을부터 학원 매물이 나와 있는데 아직까지 그대로 운영하고 있다. 들어올 학원이 없어서 그렇다”며 “부모들이 경제적으로 힘들다보니 학원을 한 두달만 다니고 그만 두는 학생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배두헌 기자/badhone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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