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여행] 남진야시장의 춤바람, 유쾌해진 목포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유달산 꼭대기엔 페이스북 ‘좋아요’ 바위가 있다. 일등바위 남쪽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든 모습의 이 바위는 요즘 명랑한 목포을 말해준다.

‘좋아요’ 바위 근처에서 내려다 본 목포대교 인근의 야경은 명품이다. 목포 선창가 그림을 바꿔버린 통쾌한 야경에 ‘좋아요’ 백만개를 달고 싶은 마음이다.

▶목포 유달산 꼭대기 일등바위의 남쪽끝 페이스북 ’좋아요‘ 바위가 엄지를 치켜들면서 ‘나름대로 펀(Fun)을 부린’ 목포의 명랑한 변신에 화답하고 있다.

한 달 후인 2016년 1월엔 ‘좋아요’ 바위가 가리키는 바다건너 고하도와 케이블카를 연결하는 사업이 서막을 연다.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이 전열을 정비해 노량해전을 준비하던 고하도와 목포대교, 유달산을 잇는 3㎞ 구간 케이블카는 동아시아 최고의 명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목포는 낭만의 항구이다. ’예향‘이 남진야시장, LED불빛거리, 질주하는 요트의 유쾌함을 덧붙이면서 웃음 넘치는 선창가로 바뀌고 있다. 목포대교 주변의 야경도 산뜻하고 경쾌하다.

■Fun 해진 목포와 ‘좋아요’ 엄지손가락 바위

목포는 항구다. 과거엔 눈물의 항구였고, 지금은 유쾌한 선창가이다. ‘목포의 눈물’이 ‘목포의 웃음’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이 묻힌 난영공원에서 불과 1㎞ 떨어진 자유시장은 지난 11일 남진야시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웃음과 재잘거림이 넘친다. 자유시장 정미소 주인 아들로 ‘저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을 꿈꾸던 가수 남진의 이름을 땄다.

삼학도 김대중 전 대통령 기념관 바로 옆에는 수십척의 요트가 줄지어 서서, 목포대교 긴긴 다리 위에 저녁해가 걸리는 풍경을 향해 달음질 치려는 출사 마니아 단체손님들을 기다린다. 원도심 로데오 광장부터 목포역까지 오는 1월 2일까지 온갖 조명이 밤늦게까지 불밝힌다.

[목] 놓아 울고싶은 사람을 [포]근히 감싸준다는 목포의 의미가 ‘나름대로 펀(Fun)을 부린 선창가 다방 마담’의 21세기형 변신 때문에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목] 놓아 울 수도 있는 사람을 [포]복절도까지 하게 만드는 곳으로 말이다.

▶비운의 학 세마리가 떨어진 삼학도. 이곳엔 세기의 스타 이난영 공원과 요트계류장이 있다.

■대학루에 눈은 내리는데….

2015년 12월 17일 오전 목포엔 눈이 내렸다. 세상의 모든 활어회 맛을 모아둔 듯한 준치회무침으로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 할 때는 맑았다. 그러다 국도 1,2호 기점인 유달동 4거리쯤부터 흐리더니 유달산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노적봉에 이르자 서서히 영화 ‘34번가의 기적’ 같은 눈을 뿌리기 시작한다. 누워 계신 이순신 장군 큰 바위 얼굴의 콧수염 역할을 하는 ‘노적봉 소나무’에 하얀 눈이 포근하게 쌓여갔다.

▶유달산에서 남서쪽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대승후 전열을 정비한 고하도와 마음이 따뜻한 온금동 마을이 보인다. 2017년엔 고하도와 유달산을 잇는 3㎞길이의 케이블카가 놓인다.

큰바위 얼굴 건너편 장군의 동상을 조금 지나 대학루(待鶴樓)에 이르자 폭설로 변한다. 상사병 끝에 학으로 변한 삼학도 여인 셋이 연모하던 수련사관(修練士官)을 찾아 유달산에 날아왔다가 화살의 맞은 곳이 대학루이다. 세 마리 학은 비틀거리며 비행하다 유달산 앞 세 개의 섬에 떨어져 죽었는데 이 곳이 바로 목포의 또다른 대명사 삼학도라고, 목포 역사문화해설사계의 대부 조대형씨는 설명한다.

폭설은 대학루 언덕 바로 밑에 있는 조선내화 창업주의 고급 대형 정원도, 가난하지만 마음이 따스한 다순구미(溫錦:온금) 달동네도 모두 하얗게 만들었다.

다시 10분쯤 올라 해공 신익희 선생이 현판을 쓴 유선각(儒仙閣)에 이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청명한 날씨를 뽐냈다. 일등바위 남쪽 ‘좋아요’ 바위가 선명하게 앵글에 잡힌다. 하지만 다시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다가 홍법대사 부조가 있는 일등바위 바로 아래에 이르자 다시 청명한 날씨로 돌아왔다. 일본 불교의 원조인 홍법은 목포에서 100년 넘게 살았으니, 목포사람으로 귀화했다고 봐야 한다는 말도 들린다.

■예향의 비결-팔색조 문화


이날 유달산 주변의 날씨는 여덟 번 변했다. 지형적 특성상 동해에 인접한 대관령의 잦은 기상변화와 비슷한 원리이다. 목포는 1897년 ‘자발적으로’ 개항한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중국, 한국 팔색조 문화가 혼재했다. 예로부터 ‘길목’ 도시였기에 다양한 문화의 유입이 낯설지 않았다. 다양한 문화를 전통과 버무려 발전시킨 목포사람들은 빠른 문화적응력, 포용력, 창의력을 가졌다. 목포에 유난히 문화예술인들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개항직후 6개국 거류지를 허용하면서, 영국은 세관과 영사 시스템 등 서양식 공공경영(governance)의 합리성을 알려주었다. 러시아는 온금동 일대에 군사기지 부지를 매입해 인연을 맺으면서 군사시스템과 저탄소 동력의 원리를 선보였다. 온금동엔 입구가 좁고 내륙으로 파고든 부두가 넓은 ‘째보선창’이 있었는데, 매립되기전엔, 예각인 좌회전길을 미처 틀지 못해 배와 승용차가 충돌하는 기상천외한 사고가 가끔 발생하는 곳이란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대거 입항해 ‘양동교회’를 중심으로 의료 봉사하고 교육하면서 기독교의 참된 복음을 전파했다. 프랑스 전통에 뿌리를 둔 가톨릭 교파 '레지오 마리애'도 목포 개항과 함께 한국 최초로 들어왔다. 미국인 하롤드 헨리 신부는 개항할 때 설립된 산정동 성당을 중심으로 한국에 가톨릭 정신을 심었다. 호남 크리스천의 산실인 목포는 ‘성지순례’ 투어로도 유명하다. 양동교회는 지금 성지화, 문화관광자원화를 위한 증축공사가 한창이다.

■목포를 사랑한 박정희

목포의 포용력은 동서화합의 밀알이다. 목포를 유난히 사랑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충무공장군상 휘호를 쓰고, 맞은편의 새천년시민종각 현판은 김대중 전대통령이 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재건회의 의장시절 부터 대통령 재임중일때 까지 목포를 수없이 찾아와 음식과 풍광을 즐겼고, 조선내화 창업주와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역동적인 목포에서 한국 경제 발전 구상을 토로했다고 해설자들은 전한다.

대구와 목포 관광공무원이 교류하고 구미 박정희 재단과 목포 김대중 재단이 공동사업을 논의중이다.

‘목포는 항구다’의 이난영과 ‘이별의 부산정거장’의 남인수(재혼)는 최초 연예인 영호남 커플이다. 이난영이 묻혀있는 수목장 공원은 삼학도에 있다. 요즘 난영(1916~1965)의 재조명이 한창이다. 눈물의 아이콘이 아니라 ‘즐거움’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그가 데뷔한지 2-3년만에 샹송이나 칸소네 풍의 ‘비음’을 발성에 접목시키고, 데뷔한지 5년만인 1939년엔 대중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기 위해 박향림, 장세정, 이화자와 함께 ‘저고리시스터즈’라는 한국 최초의 걸그룹 유닛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20년후엔 친딸과 조카딸로 구성된 ‘김 시스터즈’를 결성해 미국에 진출시킨뒤 초기 작품 ‘닐리리야’를 직접 서양풍을 편곡해주는 실력과 기획력을 보이면서 ‘K팝 한류’의 기틀을 닦았다고 문화해설사들은 전한다. 1963년엔 라스베이거스에서 딸들과 함께 흥겨운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자유시장 정미소집 아들 남진의 흥겨운 가락이 야시장을 바람난 골목으로 바꾸었다.
▶자유시장 정미소집 아들 남진의 흥겨운 가락이 야시장을 바람난 골목으로 바꾸었다.

■손님도 주인장도 춤추는 남진야시장

목포의 눈물은 웃음의 전주곡이다. 애환과 흥겨움을 예술로 표현하는 공통된 기반은 풍부한 감성이기 때문이다.

난영의 한세대(30년) 후배 남진에게도 흥이 있었다. 남진야시장이 개설된지 꼭 일주일만에 이곳을 찾았다. 무대위에선 흥겨운 음악이 연신 흘러나오고 먹거리 포장마차촌에 장사진을 이룬 식객도 주방장도 지루할 사이 없이 리듬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오른쪽 두번째)은 1930~1960년대 대스타일 뿐 만 아니라, 대중문화 실험가요 기획자였다. 그는 최초의 걸그룹결성, 최초의 한류 개척자였다. 사진은 딸 둘과 조카딸로 구성한 ‘김시스터즈’와 함께 미국 라스베이거스 공연을 마친후 행복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낭만에 대하여 정통한 항구도시 답게 곳곳에 선술집이 들어서고 퓨전 팬케익, 우즈베키스탄, 태국, 중국, 일본, 필리핀 등 세계 각국 전통음식점, 목포 5미 음식점 등이 관광객들을 무한먹빵으로 유도했다. 아시아 여러나라 물품, 공예품, 민화, 디자인 소품 등이 선보여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상인들의 질펀한 입담도 허벌나게 구수하다. “홍어 거시기 거시기 허는디, 어떻게 생겨묵었는지 함 봅시다”, “아따, 쩌번 왔던 거시기도 홍어 거시기 내놓으라고 야단이던디. 또 보자네. 홍어는 암컷이 비싸. 그라서 ‘거시기’가 보이면 싹둑 잘라버리재. 암컷으로 팔라고. 우짜까이, 젤로 소중한 것인디.”

열린 목포는 즐거운 항구이다. 한밤 목포발 0시30분 제주행 쾌속정의 뱃고동이, 한낮 요트 세일의 펄럭임 소리가 그렇고, 저녁엔 후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시장의 시끌벅적한 인정이 쾌활하다. 음악을 사랑하기에 대중문화 R&D에 매진했던 난영도 원래 명랑 소녀였다. 감성과 포용의 펀더먼털이 탄탄한 목포의 유쾌한 변신은 무죄이다.

abc@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