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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김필수] ‘암보(暗譜)’라 쓰고 ‘연습(練習)’이라 읽는다
최근 SNS에서 화제인 에피소드가 있다.

199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콘서트홀 콘체르트허바우. 세계적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Riccardo Chailyㆍ62, 당시 46)와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Maria Joao Piresㆍ71, 당시 55)가 마주하고 있다. 저녁에 열릴 본공연의 리허설을 겸한 공개콘서트 자리다. 물론 청중도 있다.

그런데 자리에 앉은 마리아의 표정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리카르도의 지휘에 맞춰 울리는 오케스트라의 전주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마리아는 21번을 열심히 준비해 왔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마리아의 하소연에도 리카르도는 막무가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계속된다. 몇 번을 망설이다 호흡을 가다듬은 마리아는 끝내 협연을 마무리했다.

암보(暗譜). 마리아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악보를 외우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당황했지만, 머릿속 악보는 곧 양 손에 전달됐다. 마리아 정도의 연주자라면 이런 곡이 몇 곡은 더 있을 터다.

이제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손열음(29). 그는 한 언론의 칼럼에서 “고백하자면 ‘새 악보를 읽고 외우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이다. 가감 없이 말하건대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보다 악보를 더 빨리 읽거나 외우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자신했다. 비결은 손, 머리, 귀를 모두 쓰는 공(共)감각이다. 손으로 계속 치고, 머리로 그림처럼 저장하고, 귀로 많이 듣는 것. 어느 한 가지가 삐걱대도 다른 것이 받쳐줘 실수 없는 연주가 가능해진다는 게 손열음의 말이다.

피아니스트에게 암보는 공포다. 손열음은 피아니스트들이 떠는 이유의 90% 이상이 암보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피아니스트 윤디 리(33)는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불린다. 2000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18세) 우승한 천재다. 얼마 전 조성진(21)이 우승해 화제가 된 그 대회다.

천하의 윤디 리도 지난달 30일 한국에서 큰 곤욕을 치렀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에서 음표를 빼먹고, 박자를 놓치는 등 황당한 실수를 했다. 그것도 자신이 쇼팽 콩쿠르에서 연주해 우승한 쇼팽 협주곡 1번이다. 암보랄 것도 없고, 이제는 눈감고도 칠 수 있는 레퍼토리일 텐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두 살 때 피아노를 시작한 러시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Evgeny Kissin·44). 그는 ‘피아노의 신(神)’으로도, 또 ‘지독한 연습벌레’로도 불린다. ‘노력하는 천재’인 셈이다. 해외 연주시 계약조건에 ‘하루 6시간 연습시간 보장’ 조항을 넣을 정도다. ‘제2의 키신’이라는 말이 극찬이 되는 데는, 또 많은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키신을 롤모델로 꼽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마리아가 바뀐 레퍼토리를 곧 연주할 수 있었던 데에도, 손열음이 누구보다 빨리 악보를 외우는 데에도, 또 윤디 리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른 데에도 ‘연습’(물론 윤디 리는 연습 부족!)이라는 똑같은 이유가 자리하고 있다.

이게 암보라 쓰고 연습이라고 읽는 이유다. 


pils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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