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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필름시대사랑’ 장률 감독 “필름 돌아온다고 믿어”
[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니들이 영화를 알아? 쥐뿔도 모르면서…”

조명부 스태프인 남자가 촬영 현장을 박차고 나간다. 홧김에 필름 한 통을 낚아채온 그는 정처없이 걷기 시작한다. 이어 카메라는 남자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영화의 이미지를 펼쳐놓은 듯, 적막한 촬영 현장의 구석구석을 다양한 방식으로 담아낸다. 순간, 관객은 서사와 인물에 집중하느라 잊고 있었던 영화의 ‘공간’에 눈을 돌리게 된다.

‘필름시대사랑’은 영화에서 소외된 공간, 그리고 (필름)영화에 대한 감독의 사랑이 담긴 헌정시와 같은 작품이다. 전작 ‘망종’, ‘경계’, ‘중경’ 등에서 경계인들의 쓸쓸한 삶의 풍경을 그려온 장률(53) 감독이 이번엔 ‘영화’에 눈을 돌렸다. 그는 배우들과 스태프들로 북적이던 현장이, 이들이 떠난 뒤엔 어떤 모습일 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서울노인영화제 측의 부탁을 받아서 개막작 단편을 만들었어요. 사흘 촬영하고 작업이 끝났는데, 그 공간이 계속 생각났어요. 영화를 찍다보면 공간도 사람처럼 보이거든요. 촬영이 끝나면 무정하게 철수하는데, ‘우리의 감정이 들어갔던 공간에 남겨진 것이 과연 아무 것도 없을까’ 생각했죠. 며칠 잠이 안오더라고요. 결국 스태프 몇 명을 다시 모아서 2회 차를 더 찍었어요.”

전작 ‘경주’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박해일이 조명부 스태프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이 시대 ‘영화’와 ‘사랑’의 진정성에 질문을 던지는 감독의 자아를 반영하는 동시에, 촬영 현장의 시스템에 대한 자기반성을 담은 캐릭터다. 장률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감독과 배우들의 생각이 많이 다른데, 대체로 감독의 의지대로 강행한다. 다른 생각이 동의되지 않는 그런 시스템에 의문이 들면서 박해일을 대변인으로 내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실제 영화 현장에 가보면 조명팀에 인물이 잘난 친구들이 꽤 있다”고 웃어보였다.

영화는 총 네 편의 챕터로 구성된다. 두 번째 챕터의 경우, 사람이 없는 건물의 이곳저곳을 긴 호흡으로 담아내며 흡사 정물화같은 화면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여기엔 사건도, 인물도, 대사도 없다. 이 점이 관객들에겐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물었더니, 그는 “어떻게 보면 제 모든 영화 중에서 제일 수월한 영화”라고 답했다. 익숙한 영화의 내용이나 형식이 기준이라면 어려워보일 수 있지만, 실제 우리 삶의 리듬과는 오히려 더 가까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실 이야기 구조가 탄탄한 영화들이 제 입장에선 더 어려워요. 실생활이 그렇게 탄탄할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잘 만들어진 멜로영화를 볼 때도 오히려 어렵게 느껴지고, ‘정말 저럴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 일반적으로 ‘영화는 이렇다’는 관념이 있는데, 우리 생활의 파편으로 생각하고 그 리듬을 떠올리면 전혀 어렵지 않죠. 결국 ‘어렵다’ ‘어렵지 않다’는 상대적인 것 같아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필름시대사랑’엔 필름영화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두 번째 챕터는 필름 특유의 질감이 두드러진다. 거칠지만 아련한 정서가 묻어나는 화면은, 평범한 병원 시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더 나아가 각각의 공간이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마법이 펼쳐진다. 세 번째 챕터는 박해일, 안성기, 문소리, 한예리의 전작 가운데 필름영화의 일부(‘살인의 추억’, ‘쉬리’, ‘오아시스’, ‘귀향’)를 가져와 무성영화 형식으로 꾸미기도 했다.

“저도 디지털 영화를 좋아해요.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문턱이 낮아진 건 좋은 일이죠. 그런데 필름과 디지털은 질감이 전혀 달라요. 필름의 질감과 정서에 맞는 영화가 있는데 할 수 없이 디지털로 찍어야 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예요. 생태계에서 작은 종이라도 존재할 권리가 있고, 그것이 사라지면 생태에 문제가 생기죠.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주류는 아니지만 작은 종으로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필름이 돌아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요.”

ham@heraldcorp.com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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