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 ‘물에 잠긴 아버지’남로당원 아버지를 둔 한 남자의 이야기굴곡의 현대史속 ‘물’처럼 용해돼 더 신산
남로당원 아버지를 둔 한 남자의 이야기굴곡의 현대史속 ‘물’처럼 용해돼 더 신산
치매 노부부 통해 사랑·죽음 깊이 성찰
뒤늦게 알게된 ‘당신’의 본심은 결국 사랑
평생 소설을 쓰며 다작을 해온 우리 문단의 두 거목, 소설가 한승원과 박범신이 나란히 신작 장편소설을 펴냈다.
올해 희수를 맞은 한승원의 ‘물에 잠긴 아버지’와 올해 칠순을 맞은 박범신의 ‘당신 꽃잎보다 붉던‘이다. ‘물에 잠긴~’은 한 씨의 서른여섯번째 장편소설이고, ‘당신~’은 박씨의 문단생활 42년째의 42번째 장편소설이다. ‘물에 잠긴~’이 현대사의 질곡 속으로 되돌아가 상처를 다시 헤집어봤다면, ‘당신~’은 치매를 통해 사랑의 이상과 현실이 균열을 일으킨 지점으로 직진해 들어간다는 점에서 닮았다. 두 작품은 성찰이라는 노년문학의 한 전형이 될 법하다.
한승원‘ 물에 잠긴 아버지’ |
한승원의 ‘물에 잠긴 아버지’는 남로당원 아버지를 둔 한 남자의 이야기로 25년 전 쓴 희곡 ‘아버지’를 장편소설로 재구성했다.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빨치산의 활동이 왕성했던, 작가의 고향 근처 마을 유치를 배경으로 했다. 주인공 김오현은 다섯살 때 부엌 속 골방에 갇힌다. 할머니가 거기로 밥을 가져와 먹여주고 똥 오줌도 요강에 처리한다. 그렇게 긴긴 시간이 흐른 뒤 할아버지 품에 안겨 바깥으로 나온다. 세상이 빨치산과 토벌꾼으로 생사가 갈리던 시절이다. 오현의 아버지 김동수는 남로당 유치면 총책으로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일제 때 고등계 형사를 지낸 최씨 집안의 셋째 아들 최종식을 인민재판에 부친 것. 최종식이 마을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고 경찰이 마을을 접수하자 최씨 집안사람들은 김동수네 가족들을 몰살시킨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할아버지가 오현만은 살려달라며 목숨을 구걸해 지킨 손자가 김오현이다. 오현은 늘 할아버지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고등학생 때 장가를 가고 할아버지 소원대로 가능한 한 많은 자식을 낳는데 열중한다. 자신을 조롱하는 친구들에게 성적인 수모를 당하고 옆집 노총각에게 아내를 추행당해도 그저 묵묵히 자신만을 탓하며 납작 엎드린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다만 끊임없이 자식을 낳는 것으로 존재증명을 할 뿐이다.
물에 잠긴 아버지/ 한승원 지음/ 문학동네 |
박범신‘ 당신 꽃잎보다 붉던’ |
박범신의 ‘당신~’은 사랑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작가 특유의 소설적 재미를 선사한다.
당신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문학동네 |
소설은 서늘하면서 관능적이다. 특히 윤희옥이 남편을 매장하는 소설의 첫 장면은 압권이다.
“물이 된 그가 싱싱한 매화나무 껍질 속 물길을 타고 쏴아, 상승하는 걸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가 먼길을 달려가 허공에서 꽃망울과 하나로 섞여드는 상상은 오붓하고 비밀스럽다. 이윽고 꽃들은 다투어 피고. 아무렴, 그는 나와 함께 저 거대한 허공을 제 품에 자유로이 품을 터이다.”(22쪽)
윤희옥은 남편의 ‘비밀의 정원’인 작은 다락방에서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장 속의 남편은 윤희옥이 기억하는 남편과 전혀 다르다. 남편이 즐거워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장면에서 남편은 가슴이 찢어진다고 쓰고 있다.
소설은 이 어긋남, 틈을 벌여나간다. 남편은 아내의 모든 것을 알고 기억하고 있었고 그 비밀을 들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살아온 것이다. 거기엔 그녀가 한때 사랑해 일탈했던 남자의 기억도 들어있다.
치매에 걸린 남편은 인내와 헌신으로 일관했던 이전의 삶을 부정하지만 윤희옥은 그 모습에서 “관계의 윤리성에서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건 공평함”이라는 걸 깨닫는다. 사랑과 욕망의 그늘을 탁월하게 그려온 작가는 이번엔 노년의 부부의 삶, 사랑, 죽음의 이야기로 또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