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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속으로 - 이철희] 정치를 해치는 ‘착한 무능’
진정성이란 단어가 정치권에 애용된 적이 있다. 지금도 적지 않게 쓰인다. 진정성의 사전적 정의는 진실하고 참된 성질이다. 정치적 용례는 가식이나 사욕보다 오직 진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할 때다. 그런데 정치는 결과로 말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공존하는 시스템이 바로 정치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그들의 이해와 요구를 지켜주지 못하면 아무리 진심을 강조해도 허망할 따름이다. 때문에 정치에서 가끔 진정성은 무능을 가리는 변명으로 쓰인다. 

워낙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국민을 앞세우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말을 영혼 없이 남발하다 보니 그렇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진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또 실제로는 사익을 추구하면서 마치 대단한 명분을 가진 양 위장하는 것에 식상한 나머지 진정성을 보여주면 그 정치인이 좋게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잘하려고 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잘 하지 못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방편으로 작용하기 쉽다. 정치는 사회 구성원 간의 몫을 조정하고, 상벌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그 의도보다는 결과로 평가되어야 한다.

정치인이 얼마나 착한지나 정직한지를 말하는 걸로 진정성이란 단어를 쓰는 건 무의미하다. 정치인은 지역적ㆍ계층적ㆍ집단적ㆍ이념적 대표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사회의 한 부분을 대표(representation)하고 대변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진정성이란 어떤 정치인이 자신이 대표하고자 하는 그들의 이해와 요구를 얼마나 충실하게 대변하는지를 따질 때 유용한 개념이 된다. 진정성이 어떤 정치인의 품성(character)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을 지칭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진정성을 이렇게 정의해야 그 책임을 온전하게 물을 수 있다.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묻지 않으면 정치는 가진 자들의 권력놀음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가 자신이 대표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충실히 대변하고 있는지에 따라 상을 줄지 벌을 줄지 물어야 한다. 책임을 묻지 않으면 제대로 대변하는 노력을 구현하지 않을 것이다. 상벌의 책임이 명확하고 가차없을 때 정치인은 열심히 대표하고, 대변하고자 애쓸 것이다. 이것이 정치학에서 말하는 대표ㆍ책임의 원리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ㆍ책임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체제는 좀비 민주주의(zombi democracy)가 된다. 민주주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을 평가할 때에는 진정성보다 책임성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 착하고 선의로 충만하지만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 정치인에게 박수를 보내선 안 된다. 설사 착하지 않고, 나쁜 의도를 가졌더라도 다수에게 유용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정치인에게 호의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가장 나쁜 정치인은 착한 데 무능한 인물이다. 약자를 편들고, 그들의 삶에 공감하려면 심성이 착해야 하지만 반대와 압박을 뚫고 그들의 이해와 요구를 정책과 법으로 관철하려면 착한 것만으로는 안 된다. 실력이 필요하다. 화려한 스펙과 선한 마음이 좋은 실력을 낳는 건 아니다.

정치인의 실력은 차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다수를 형성해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결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자신이 옳다는 점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청과 대화, 소통과 양보, 심지어 거래와 협상 등으로 타협을 이뤄내는 능력이다.

베버의 표현에 따르면, 신념윤리보다는 책임윤리를 추구해야 실력이 는다. 실력을 기준으로 정치인을 평가하기 위해선 제도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정지역에서 특정정당의 공천만으로 당선이 보장된다면 실력을 키울 이유가 없다. 때문에 선거제도도 중요하다.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도록 해야 열심히 실력을 기르려 하고, 유권자도 실력을 기준으로 지지후보를 선택하게 된다. 진정성, 지역 등이 아니라 성과, 실력으로 승부하는 정치가 되면 보통사람의 삶도 훨씬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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