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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영규 기자의 세계戰史 엿보기]워털루 전투 200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와 유럽의 통합-②
[헤럴드경제=문영규 기자]역사는 승자의 것입니다. 전쟁에서 진 자가 패전을 기념하기란 쉽지 않죠. 200주년을 맞은 워털루 전투도 그랬습니다. 명목상 유럽을 위기에서 구한 영국은 200년이 지나도 옛 전투를 다시 재현하고 나폴레옹의 대제국 재건의 꿈이 백일천하로 끝났던 프랑스로서는 굳이 다시 돌이키고 싶지는 않은 사건이었을 테죠.

사실 하루 만에 수만 명의 사상자가 난 이 전투는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그리 유쾌한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을 비롯한 프러시아, 네덜란드 등 연합군은 5000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포함, 2만4000명의 전사상자가 나왔고, 프랑스군은 정확한 숫자를 추산하기 힘들지만 최대 2만6000명이 죽거나 다치고 7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1만5000명이 실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재현된 워털루 전투. [사진=게티이미지]

프랑스군 7만3000명과 연합군 6만8000명의 격돌. 수적으론 약간의 열세를 보였지만 시간은 연합군 지휘관 웰링턴의 편이었습니다. 프로이센군의 합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죠.

1815년 6월 18일. 결전의 날 나폴레옹의 공격을 지연시킨 것은 날씨였습니다. 비가 온데다 질척이는 땅 때문에 진군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오전 2시간을 허비하게 되죠.
워털루 전투의 전황을 보여주는 지도. 붉은색이 영국 주도의 연합군, 푸른색이 프랑스군이다. [사진=게티이미지]

오전 11시께 포격을 시작으로, 웰링턴이 위치한 몽생장(Mont Saint Jean)을 향해 프랑스군의 진격이 시작됐습니다.

웰링턴은 지형을 잘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능선 뒤로 병력을 후퇴시켜 피해를 최소화했죠.

웰링턴은 전선 중앙에 위치한 농가에 소수병력을 배치해 나폴레옹의 공격을 막고자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곳 농가에 집착했고 대규모 병력이 집중됐습니다. 일종의 ‘미끼’였던 거죠. 이는 곧 병력의 효율적 분산을 막은 셈이 됐습니다.
전투를 독려하는 연합군 총사령관 아서 웰즐리 웰링턴 공작. [사진=게티이미지]

나폴레옹은 계속 병력을 보내 끊임없는 공격을 주문합니다. 영국군이 돌파될 즈음, 픽톤 장군의 병력이 추가투입되고 프랑스군의 공격이 주춤하자,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영국군 중기병이 돌격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기병대가 반격에 나서고 포병대의 포격이 이어지자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밀고 밀리는 공방 속에 나폴레옹은 포병대를 동원해 대규모 포격을 가합니다. 병력손실을 막기 위해 웰링턴은 다시 능선 뒤로 병력을 무르고, 프랑스군의 미셸 네 원수는 썰물처럼 빠지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병대에 돌격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군으로서는 뼈아픈 실수였습니다. 보병과 포병의 엄호없이 돌격한 것은 무모한 전술이었기 때문이죠. 워털루는 5000군마의 무덤이 됐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의 전략적 실책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나폴레옹이 몸상태가 좋지 않아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겼다는 설도 있습니다.
농가를 방어하는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결전병력으로 투입된 프랑스 기병대는 언덕을 넘자 사각형으로 촘촘히 방진을 구성한 영국군 병력과 맞부딪칩니다. 총칼때문에 섣불리 방진으로 뛰어들지 못한 기병대는 영국군의 사격에 진영을 배회하다 쓰러집니다. 네 원수는 퇴각하는 기병대에 재차 공격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견고하던 영국군 방진도 기병의 충격력으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오후 5시, 위기의 웰링턴을 구한 것은 워털루로 합류한 10만 프러시아군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동안 아껴놓았던 예비대를 내보내 상대하게 합니다. 프러시아군을 추격하라고 보낸 그루시 원수의 3만 병력은 프랑스군 본대와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네 원수는 영국군을 분쇄하기 위한 예비대의 증원을 요청했지만 보낼 예비대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패배는 가까워져 왔습니다.

이제 산술적으로 따져도 프랑스군은 열세였습니다. 전세는 기울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프랑스는 최후의 결전을 감행합니다. 자신이 아끼던 근위대의 투입을 결정한 것이죠. 사실 나폴레옹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영국군의 방진으로 돌격하는 프랑스 기병대. [사진=게티이미지]

웰링턴은 마지막까지 기지를 발휘합니다. 언덕 능선에 군을 엎드리게 해 병력을 숨기고 프랑스군의 진격을 기다린거죠. 프랑스군이 언덕에 다다른 순간 영국군은 일제히 일어서서 사격을 가합니다. 기습적인 사격에 위풍당당하던 근위대도 등을 보이며 퇴각합니다. 동시에 프러시아군도 프랑스군 예비대를 물리치고 진격합니다.

마지막까지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킨 것은 나폴레옹의 친위대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퇴각할때까지 남아 퇴로를 방어했고 웰링턴의 항복권고마저 거부해 한 명도 빠짐없이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워털루에서 달아나는 나폴레옹. [사진=게티이미지]

연합군은 22일 파리로 진군했고 24일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으로 다시 유배돼 백일천하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러시아가 결성한 빈체제가 출범하고 외교협의체로서 유럽 통합과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죠.

ygmo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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