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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연> 마크 로스코 연기한 정보석 “왜 이 작품 한다고 했을까”
[헤럴드경제=신수정 기자] “요즘 잠을 못 자요. 10년 동안 빨간색 차만 타고 다닐 만큼 빨간색을 좋아했는데…. 지금 ‘레드’는 저에게 고통이죠”

배우 정보석이 오는 5월 1일 개막하는 연극 ‘레드’에서 화가 마크 로스코로 변신한다. 스티브 잡스가 죽기 직전에 심취했다는 화가 로스코와 로스코의 조수 켄만 등장하는 2인극이다.

지난 23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보석은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에 가장 어려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정보석은 지난 12일 막을 내린 드라마 ‘장미빛 연인들’에서 손녀를 내다버리는 등 갖은 악행을 일삼던 백만종에서 피카소와 니체를 논하는 지적인 화가 로스코로 변신한다. 2010년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주얼리 정으로 인기를 끌다가 곧바로 드라마 ‘자이언트’의 잔악무도한 조필연으로 출연했을 때처럼 드라마틱한 도전이다.

정보석은 지난 2011년 ‘레드’ 초연 당시 관객으로 왔다가 제작사인 신시컴퍼니에 “꼭 출연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한 세대와 다음 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예요. 새로 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좋은데 우리는 후배들에게 뺏기는 것을 상실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배우로서 맡아온 역할도 어느샌가 후배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속상하고…. 로스코가 ‘앞선 세대를 짓밟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확 와닿았어요”

로스코는 캔버스 위에 네모를 색칠해놓는 등 추상적인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다. ‘레드’는 로스코가 뉴욕 시그램빌딩 내 포시즌 레스토랑에 걸 벽화를 의뢰받았을 당시 이야기를 다뤘다. 로스코는 비싼 레스토랑을 찾는 부자들이 벽화 앞에 서면 정신적인 변화를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레스토랑에 방문한 로스코는 현란한 분위기가 자신의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 계약을 파기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200만달러(약 22억원)에 달하는 그림값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정보석은 로스코라는 인물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마크 로스코전’도 찾았다.

“로스코의 그림을 직접 보고 나서 더 어려워졌어요. 안 봤으면 현학적인 표현으로 자기 주장을 강력하게 하는 사람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었어요. 막상 가서 그림을 보는 순간 ‘자기가 알지 못하는 무엇을 말로 메꾸려했던 사람이 아니구나, 자기가 아는 무엇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서 답답해 했을 사람이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더 어려워진거죠. 수렁에 빠졌어요”

극중 로스코는 “예쁜 그림이나 그리려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각을 하게 하려고 그림을 그린다”고 외친다. 정보석 역시 말초적인 막장 드라마에도 출연하지만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연극도 놓치지 않고 있다. 연습이 한달, 두달 반복되는 연극은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레드’는 그중에서도 단연 힘든 작품이다.

“로스코가 실제 했던 말들이 연극 대사로 쓰였어요. 로스코는 진실을 봤고 그 상태에서 떠오른대로 막 뱉어낸거예요. 날 것인 거죠. 개연성이 없어서 대사 외우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예전에 연극 ‘길 떠나는 가족’에서 연기했던 화가 이중섭은 배우로서 울컥하는 감정이 있었다면 로스코는 울화통이 터져요. 그만큼 연기하기 어렵지만 관객 입장으로 보면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예요”

그는 “왜 이 작품을 한다 그랬을까. 관객으로만 볼 껄. 바보”라고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있다. 하지만 연극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세상 그 어떤 것에서도 느껴보지 못하는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극은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전히 집중하게 되잖아요. 아무것도 안 끼어들어오죠. 그렇게 살고 났을 때 행복이 있어요. 그걸 못 잊어서 하는 거죠. 연극은 할 때도 즐겁지만 보는 것이 더 즐거워요. 영화는 팝콘이나 콜라도 먹으면서 보지만 연극은 두시간 동안 꼼짝달싹 못하잖아요. 성북동으로 이사온 것도 연극을 많이 보고 싶어서예요”

정보석을 연극으로 이끈 것은 셰익스피어였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 앞에서 셰익스피어 전집을 샀다. 고등학교 시절 가출할 때도 셰익스피어 전집을 들고 나갔다. 셰익스피어 덕에 연기를 시작하게 된 그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을 인생의 3대 작품으로 꼽았다.

“‘햄릿’은 청년기, ‘오셀로’는 중년기, ‘리어왕’은 노년기의 고민과 갈등을 담고 있어요. ‘햄릿’은 2013년에 출연했었고, 다음은 ‘오셀로’가 되겠네요”

신시컴퍼니

1986년 KBS 드라마 ‘백마고지’로 데뷔한 그는 어느덧 30년차에 접어든다. 희대의 악녀 연민정이 등장하는 드라마 ‘왔다 장보리’에 빗대 ‘왔다 백만종’이라고 불릴 정도로 열연을 펼쳤지만 “난 아직 아마추어”라고 말했다.

“처음 연기 시작했을 때는 대본을 총천연색 펜으로 칠했어요. 연기력을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에 치밀하게 구성하려고 했어요. 10년쯤 지나서는 전체적인 상황을 보려고 노력했죠. 조금 편해졌나 했는데 ‘레드’로 20년만에 고통을 맛보고 있어요. 로스코는 진실에 다가간 사람이고, 전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연기 공부의 핵심은 ‘내가 어떻게 사는가’인 것 같아요. 내 눈으로 본 것들을 그때 당시의 필터로 걸러져 다시 방출되는 것이 연기니까요”

ssj@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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