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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숨결 담긴 간장·된장·고추장·청국장…패스트푸드에 찌든 현대인 살리는 ‘느림의 건강식’
짧은 침묵이 흘렀다. 가운데 놓인 사각테이블 위로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장이 우리 한식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만든 묘한 정적이었다. 리츠칼튼 2명의 셰프가 장을 활용한 한식을 중국에 소개하러 간다기에 잡은 인터뷰 자리. 하지만 그들 앞에서조차 한식과 장의 ‘연결고리’는 그럴듯한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아보였다.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것에서 ‘산소’가 갖는 의미를 새삼스럽게 물어보는 느낌이랄까. 모든 한식에 당연하게 쓰여서 오히려 무심했던 장의 존재는 재정의되기보다 지금처럼 우리 식탁에 ‘묻어있는’ 편이 더 자연스러워보였다.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하지만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어려운 정적 끝에 한 셰프가 한 문장을 뱉어냈다. “사람은 만들 수가 없는 것이 장이 아닐까요”.

맞다. 숙성과 발효는 시간이 필요하다. 흔히 ‘깊은 맛’이라 표현하는 그것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손을 빌린다. “자연적으로 생각되는 맛이죠. 인공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맛이 나오는 겁니다”. 사람의 역할은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것 뿐이다.

장은 한식의 탄탄한 기둥이다. 모든 반찬에, 국에, 찌개에, 요리에서 장은 깊고 소박한 한식의 맛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예로부터 ‘음식의 맛은 장 맛’이라 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만인의 구호가 된 요즘, 웰빙식으로 한식이 재조명되면서 덩달아 장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는 소식이 반갑다. 어제보다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 하루하루 더 익어가는 장의 깊은 속에 대한 이야기.



장(醬), 느림의 미학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을 한데 일컬어 ‘장’이라고 하는데 이들 모두 그 시작은 콩이다. 장을 정의하면 콩을 주원료로 발효시킨 조미료다. 콩이 갖고 있는 영양적 효능이 가득 들어있는데, 콩의 대표적 효능으로는 항암작용, 항산화작용, 콜레스테롤 저하작용 등이 있다. 단백질이 가득하지만 콩보다는 소화하기 쉽다. 어느면으로보나 한국의 전통장은 맛 돋우기용의 평범한 조미료와는 차별화된다.

장이 필요하면 숟갈과 그릇 하나를 양손에 들고 장독대로 달려갔다. 겨울에는 칼바람마저도 뚫어야하는 수고스러움이 들지만 내가 여기에 있고 장이 저기에 있다면 내가 달려가는 수 밖에 없다. 장독에서 된장이며 고추장을 퍼올리는 장면은 사라진지 오래다. 냉장고와 조미료 찬장을 채우고 있는 것은 마트에서 담아온 기성품들이다. 플라스틱통에 담겨있는 장들은 편리하지만 장의 ‘소울’을 느끼기엔 너무 가볍다.

장이 태어나는 과정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느림의 미학’을 대변한다. 패스트푸드에 앓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조금씩 목소리를 더해가고 있는 슬로푸드의 정점이 바로 장이 아닐까.

장을 담그는 데 기초는 메주다. 하루 정도 콩을 불린 후에 가마에서 충분히 익힌다. 익힌 콩을 절구나 방아에 넣고 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찧는데 이것을 단단하게 빚으면 대략적인 메주의 모양이 탄생한다. 모양을 잡은 메주를 적게는 일주일에서 많게는 열흘 정도 잘 말린 후에 어느 정도 딱딱해지면 다시 볏짚으로 싸서 두서달 정도 발효를 시킨다. 이후 장을 담그기 약 일주일 전에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널어서 말린다. 장을 담그는데까지만 걸리는 시간만 해도 두세달이다.

소금과 물을 섞어 메주로 장을 담근 후에 남은 것을 부스러뜨리면 된장이 된다. 오래묵혀야 맛을 내기 때문에 통기성이 좋은 용기(그래서 옹기를 추천한다)에 장시간 보관하면 풍부한 맛을 내는 장을 완성할 수 있다. 남은 것은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마다 푹푹 떠서 찌개며 반찬에 넣는 것 뿐이다.

매운 맛을 내는 고추장은 식탁에 감칠맛을 더한다. 맵지만 자꾸 먹도록 음식을 당기게 하는 것도 바로 고추장의 역할이다. 자극성이 센 빨간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이 많이 들어가 한식만의 독특한 색깔을 더한다. 고추의 들어있는 매운 성분인 가프사이신은 지방을 연소시키고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역할도 한다.



전통 장, 까다롭게 고르기

직접 장을 담근다면야 더할나위 없지만 일상이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누군가의 손을 거친 장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장의 주재료가 되는 콩부터 물까지 꼼꼼하게 따져 빚고 자연속에서 올바르게 익은 장들은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더니 어느덧 백화점 식품관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신세계가 운영하는 SSG장방이 바로 그것이다. 전국 방방곡곡 명인들의 전통장을 선별해 한데 모았는데 좋은 맛을 내는 장이 그러하듯 이 장방을 구성하는 것도 오랜 시간 꽤 많은 정성이 들었다고. 지역별, 재료별, 연도별로 같은듯 다른 맛을 내는 장들을 꼼꼼하게 따져서 고를 수 있는 것도 SSG장방만의 특징이다.

대표상품은 단연 360년 전통 고씨 문중의 10대 종부인 기순도 명인이 만든 ‘기순도 명인 전통장’. 시간, 노력, 인내로 빚어 낸 기순도 명인의 전통장은 10대 종부로 집안 대대로 전승되던 장류 제조비법을 고스란히 장 속에 담아냈다. 사용되는 원료부터 다른데, 콩은 전남 담양, 해남, 무안의 태광종을 주로 사용하며 콩이 너무 크면 싱겁고 너무 잘아도 좋지 않아 중간 정도의 콩을 사용한다고. 죽염은 신안 태평염전의 천일염을 3년 왕대에 넣어 2번 구운 죽염만을 사용하며 물은 대나무숲, 맑은 공기, 맑은 물 세가지가 어우러져 청정지역으로 유명한 전남 담양의 150m 암반수를 사용한다.

조선 4대 명신으로 추앙받는 최고의 공직자인 이항복 선생의 종가의 14대 종부인 조병희 씨가 만든 전통장은 종가 장독대 부근의 지하 160m 깊이 솟는 1급 청정수 만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된장은 간장으로 빠져나간 맛을 보충하기 위해 삶은 콩과 메주 가루를 섞어 만들어 숙성시킨 것으로 짠맛이 덜하고 구수하며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한인자 대한민국 식품명인이 조선시대 왕후 집안인 사직촌 한씨 가문과 해남 윤씨 집안 장류 제조비법을 전수받아 만든 동국장도 눈여겨 볼만하다. 

손미정 기자/balm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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