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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보드 워리어’ 조롱받던 네티즌 수사대, ‘크림빵 아빠’ 뺑소니범 잡다
[헤럴드경제=서지혜 기자] 네티즌 수사대가 경찰을 대신해 ‘크림빵 아빠’ 뺑소니범을 잡았다. 네티즌들이 한 마음으로 뺑소니 차량 운전자를 추적하고, 결정적으로 “우리 회사에도 도로변을 촬영하는 CCTV가 있다”며 인터넷에 남긴 ‘댓글’이 피의자를 자수토록 한 것이다.

자칫 의문의 뺑소니 사고로 묻힐 뻔 했던 이번 사건이 네티즌의 ‘집단지성’으로 해결되면서 그간 연예인 신상털기를 하며 ‘키보드 워리어’라고 조롱받던 인터넷 여론이 재평가받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청주흥덕경찰서 뺑소니 사건전담수사본부는 29일 밤 11시 8분께 자수한 피의자 허모(38) 씨를 상대로 조사한 사건 경위와 범행 후 행적 등 수사내용을 30일 발표했다.

▶소주 4병이상 마셔, 사고 낸줄 몰랐다=경찰에 따르면 ‘CCTV 분석 결과 범행차량이 윈스톰으로 밝혀졌다’는 보도를 보고 수사망이 좁혀져 오는 것을 직감한 허씨의 아내가 전날 밤 8시40분께 112에 전화를 걸어 “남편이 사고를 낸 것 같다”고 신고를 했고, 결국 2시간 28분뒤 허 씨가 자수 의사를 밝힌 후 출석했다.

경찰은 사고당시 허씨가 회사 동료와 소주 4병이상을 마신 뒤 자신의 윈스톰 차량을 몰고 귀가하다가 사고를 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그는 사고당시 사람을 친 줄 몰랐으며, 나흘 뒤인 지난 14일께 인터넷 뉴스기사를 보고 비로소 자신이 사람을 치어 숨지게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씨는 경찰 조사에서 “당시 혼자 마신 술이 소주 4병 이상”이라며  “사람을 친 줄 몰랐다. 조형물이나 자루 같은 것인 줄 알았다”고 진술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허씨는 사고 나흘 뒤인 지난 14일께 인터넷 뉴스기사를 보고 비로소 자신이  사람을 치어 숨지게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고를 낸 뒤 이틀에 한 번꼴로 청주에 있는 집에 왔고, 평소처럼 청원구 오창에 있는 회사에 정상적으로 출근한 것으로 조사됐다.
집에 들어가지 않을 때는 동료의 집 등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를 낸 윈스톰 차량은 충북 음성군의 그의 부모 집에서 발견됐다. 허씨는 이차량을 지난 21일 이곳에 가져다놨다.
자동차 부품 관련 회사에 다니는 허씨는 지난 24일께 동료와 함께 충남 천안의 한 정비업소에서 차량 부품을 구입한 뒤 부모 집에서 직접 수리했다.

이런 점으로 미뤄 경찰은 허씨가 범행을 은폐하려다 용의 차량이 윈스톰으로 특정되는 등 경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심리적 압박을 느껴 지난 29일 뒤늦게 자수를 결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확보한 윈스톰 차량을 흥덕경찰서 주차장에 보관 중이다.
허씨는 사고 발생 19일 만에 자수한 이유에 대해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주변을 정리하고 나서 자수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피의자 허씨에 대해 특가법상 도주차량 등 혐의로 30일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한편 사고 당시  상황을 명확히 하기 위해 현장 검증도 벌일 계획이다.

▶수사본부 꾸리고, CCTV 내놓고…네티즌이 다 했다= 아내의 크림빵을 사러 나갔다 뺑소니를 당해 사망한 ‘크림빵 아빠’ 뺑소니 사고는 지난 10일 오전 1시30분께 청주시 흥덕구 무심천변 도로에서 발생했다.

화물차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강모(29) 씨는 임신 7개월 된 아내에게 주기 위한 크림빵을 들고 돌아가다 뺑소니 차량에 치여 숨졌다. 강 씨는 강원도의 한 사범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아내와 함께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아내가 임신하자 화물차 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사고 직후 유가족은 자동차관련 커뮤니티와 SNS 등을 통해 도움을 요청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주변 지역의 CCTV 화질이 좋지 않아 범행 차량을 찾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경찰 수사력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같은 유가족의 노력으로 ‘보배드림’ 등 자동차관련 동호회를 중심으로 ‘네티즌 수사대’가 꾸려졌다. 이들은 CCTV 속 차량에 대한 정보를 동원해 추적을 시작했다.

여론이 확산되자 경찰청장까지 나서며 뺑소니범 검거를 독려하자 이례적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졌다. 인원과 예산도 확충됐다.

사고장소 인근의 CCTV 등을 분석한 경찰은 BMW 승용차를 용의 차량으로 지목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역시 용의차량이 BMW나 렉서스, 뉴제네시스 등과 유사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하지만 28일 CCTV정밀 판독결과 정확한 차종과 차량번호 판독이 불가하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자칫 수사는 미궁으로 빠지는 듯 했다.

수사 장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여겨지던 이 시각 인터넷은 또 한번 위력을 과시했다.

청주시의 한 차량등록사업소 직원이 “우리 회사에도 도로변을 촬영하는 CCTV가 있다”는 댓글을 달면서다.

차량사업소 CCTV를 확보한 경찰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경찰의 CCTV 분석 결과, 범행차량은 예상과 달리 ‘윈스톰’으로 밝혀졌다.

혼선을 빚던 뺑소니 수사가 결정적인 ‘댓글 하나’로 하룻만에 해결된 셈이다.

▶공권력 무력화하는 네티즌수사대…부작용도 커= 이처럼 인터넷 여론이 수사에 직접 나서는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비일비재하다. 지난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테러가 발생했을 당시 ‘배낭형제들’이라는 이름의 네티즌 수사대가 결성돼, 인터넷에서 테러 현장의 증거를 수집하는 데 나서 용의자의 사진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최근 어린이집 아동학대 등의 사건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관련 커뮤니티에 글을 ‘도와주세요’ 등의 올리고 여론을 조성하는 사례가 다반사다.

다음 아고라 등의 사이트를 통해 즉각 피해 사실을 알리고 서명운동을 진행하기도 한다. 피해자가 스스로 네티즌에게 알리고, 여론이 조성되면, 이 여론이 언론과 공권력을 움직이는 식이다.

하지만 이같은 여론몰이는 자칫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낳고, ‘집단지성’의 추측을 기정사실화해 불행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네티즌들이 ‘인천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의 가해 교사 신상털기를 하던 중 무고한 사람의 휴대폰 번호를 가해교사의 것으로 퍼뜨려 피해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 피해자는 당시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자고 일어나니 가해자 남편이라고, 내 번호가 알려져 부재중 전화가 196 통에 욕설 문자가 끝없이 왔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이번 사건의 경우 경찰이 현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사건 초기에 제대로 상황을 담은 CCTV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만 하다”면서도 “이번 사건의 경우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어 네티즌이 움직였던것만큼 예외적인 사건으로 봐야 한다”고 네티즌 수사대의 역할에 선을 그었다.

곽 교수는 “네티즌 중에 분명 사건을 더 잘 알고 있는 전문가가 잇을 수 있어 그들의 문제제기를 수사에 반영하는 것은 좋은 현상지만 여론의 수많은 의견에 따라서만 움직이다보면 수사력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초기의 중요한 시기를 넘길 수도 있다”며 “경찰은 이번 사건이 수사기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각성하고,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gyelov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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