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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국강병의 ’중국몽‘, 치욕의 역사에서 나왔다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1979년 비 내리는 2월의 어느날 밤, 리무진 한 대가 텍사스 사이먼턴 로데오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차 문이 열리면서 얼굴을 드러낸 이는 중국의 통치자 덩샤오핑. 9일간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중인 중국 대표단이 경기장의 맨 앞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양국 국기를 들고 나온 말을 탄 젊은 여성중 한 명이 덩샤오핑에게 카우보이 모자를 선물했다. 덩샤오핑이 그 모자를 쳐들고 흔들어대자 관중들은 환호했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의 덩샤오핑이 취한 이 단순명쾌한 제스처는 중국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향타가 됐다. 미국의 중국 전문가들은 “정치적인 마오쩌둥의 ‘죽음의 무도’가 끝나고 경제적인 덩샤오핑의 ‘서부 로데오’가 시작됐다”고 표현했다.

사진설명:중국이 근대화과정에서 겪은 참담함은 우리의 역사와 겹쳐읽기가 가능하다. 국력의 쇠락과 피점령, 내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점철된 근 1세기의 중국이 어떻게 활력과 성장의 시대로 진입했는지 지도자와 사상가의 궤적을 통해 중국을 익숙하게 만날 수 있다.


경제와 군사력에서 거침없는 질주를 하고 있는 현 중국의 힘은 몇십년 사이 생겨난 게 아니다. 컬럼비아대와 베이징 대를 거쳐 현재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에 재직중인 존 델러리 교수와 오빌 셸 아시아소사이어티 미중관계센터 소장은 그 연원을 아편전쟁에서 찾는다. 둘은 공저 ‘돈과 힘’(문학동네)을 통해 1세기 반 동안 중국을 이끈 11명의 지도자들의 삶과 사상을 살펴 중국 파워의 비밀을 읽어낸다.

여기에는 풍계분 같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진 사상가부터 서태후, 량치차오를 거쳐 쑨원과 장제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등 중국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줄줄이 들어있다.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중국이 ‘강대국’의 위치를 다시 찾기를 염원했다는 것이다. 11명의 이야기는 짧은 전기형식을 띠는데 이들을 읽어나가다보면 아편전쟁부터 문화혁명, 텐안먼 사건 등 중국의 근현대사를 자연스럽게 통과하게 된다.

중국이 오래 묵은 표어 ‘부강’이란 말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꺼내든 건 아편전쟁 전후다. 사상가 위원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구세력이 갖는 위협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중국이 충격적인 역사적 결말을 맞게 되리라고 예견한다. 그래서 부강을 강조한 법가사상에 몰두해 이를 개혁의 기초로 삼고자 했다. 그는 당시 사대부들에게 영향을 끼친 ‘황조경세문편’을 통해 “자고로 왕도 없이 부강이 실현된 적은 있어도 부강 없이 왕도가 실현된 바는 없다”며,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부국과 강병’은 국가 통치의 핵심이었다고 주장했다.

1842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하는 상황을 목격한 위원이 이를 계기로 중국 역사를 되짚어보고 서구 열강을 재평가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풍계분은 1860년 태평천국의 반란군을 피해 상하이로 도피한 것을 계기로 중국이 나아갈 바를 새롭게 제시하게 된다. 상하이 외국인 거류지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풍계분으로 하여금 자강(自强) 개념을 바탕으로 ‘교빈려항의’라는 소책자를 집필하게 해 당시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풍계분은 서구제국이 교육, 경제발전, 정치적 정당성, 지적 탐구의 속성 등 네 가지 부문에서 청나라를 능가한다고 봤다. 풍계분이 제안한 자강은 서구의 방법을 배우고 문물을 받아들이되 서구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었다.


‘몸의 여인’으로 불린 서태후도 청일전쟁 패배 이후 자강운동의 기치를 본격적으로 내걸었다. 자강파와 문화적 보수파, 청류당 사이를 오가며 청나라 최고 권력자 자리를 유지했지만 중앙 차원의 전면적 근대화를 이루어 내지는 못했다. 사회사상가 옌푸는 서태후가 자강을 위한 개혁을 도입했지만 이는 화이허 강변에 귤나무를 심은 것과 같았으며 못 먹을 귤만 열렸다고 평했다.

중국인의 머릿속에 박힌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사실상 량치차오로부터 시작된다. 량치차오는 기존 중국의 개혁개념인 부강과 자강에 서구의 정치 개념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접목했다. 그 결과 중국 개혁파의 사상과 서구의 자유주의가 혼합된 형태가 만들어졌다. 량치차오는 강(强), 즉 힘은 자유의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량치차오는 한 때 파괴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요컨대 신민(新民)을 창조하려면 중국의 가치체계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는 파괴를 도덕적 책무로까지 표현했다. 얼마후 량치차오는 파괴주의에서서 벗어났지만 이 급진 사상은 마오저뚱에 의해 계승된다.

마오저뚱은 ‘파괴 없이는 건설도 없다’는 ‘선파괴, 후건설’을 모토로 내세웠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불사해야 한다는게 그의 논리였다. 저자는 마오저뚱은 본성적으로 일상화 혹은 고착화를 못견뎌했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정치운동의 필연적 경향인 일상화와 관료화에 거세게 반항했다는 것이다. 마오저뚱의 꿈은 사회주의 열기를 다시 고조시켜 그 열정과 기백으로 중국을 산업화하는 것이었다고 저자는 읽어낸다.

중국 170여년에 걸친 지도자들의 ‘중국몽’은 중국의 향후 행보에도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의 운신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한국은 ‘부국’이라는 관점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있으나 ‘강병’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양자간의 충돌을 해결하는 일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과 힘/존 델러리ㆍ오빌 셀 지음, 이은주 옮김/문학동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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