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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태 어획량 1942년 22만t, 2007년 35t…도대체 무슨 일이
일본 금융자본 명태조업 진출로 저인망 조업
한국도 어린 명태 노가리까지 싹쓸이
경쟁적 포획 씨 말려…지구온난화도 악영향

먹장어도 식민지·분단 역사 고스란히 각인
무차별적 개발논리 날카로운 성찰


후쿠시마 원전 폭발 후 상황이 변하긴 했어도 부산 자갈치 시장의 명물 ‘곰장어’(먹장어)는 일본산이 많다. 반면 7월에 열리는 일본 교토 기온축제에서 인기를 누리는 ‘갯장어 오토시’의 재료로는 한국산을 으뜸으로 친다. 육질이 쫄깃하고 뼈가 부드러우며 지방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명태는 한국에서 조기, 고등어와 함께 ‘3대 생선’으로 꼽혀왔다. 황태, 동태, 북어, 코다리 등 건조상태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있다. 그만큼이나 요리 방법도 많다. 제사나 고사상에 올라가고, 속담에도 등장할 정도니 한국인들에겐 전통적으로 아주 친숙하고 특별한 먹을 거리였다. 해방 전인 1942년 조선에서 명태의 전체 어획량은 22만톤에 이르렀다. 그러나 1950년 남한에서의 어획량은 연간 1만~2만톤으로 줄었다. 2007년엔 35톤이 되더니 이후로는 연간 1톤 미만으로 통계상 거의 의미가 없는 수준이 됐다. 이제 명태 대부분을 수입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0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여오는 수산물 중 가장 많은 것이 명태였으며 2만4800톤에 이르렀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기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일본의 학자이자 저널리스트가 근현대기 한일 생선교류의 역사를 좇았다. 그랬더니 당연하지만 놀랍게도 생선이 나르고 들여온 길에는 식민지와 분단의 역사가 고스란히 각인돼 있었다.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과 일본에서 최고의 어류 학자로 꼽히는 두 인물의 삶과 연구를 통해 식민지배의 과거사가 양국에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온화하게 물었지만, 그것은 식민지성과 근대성에 관한 통렬한 질문이며, 과거가 아닌 양국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다. 

함경남도 한겨울의 바다에서 조선 어선이 명태 자망 조업을 하는 광경(왼쪽)과 명태를 건조하던 덕장의 모습. 모두
1930년 발간된 ‘일본지리풍속대계 16 조선 편(상)’에 수록된 사진이다.

다케쿠니 도모야스(竹國友康, 65)가 쓴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이다. 저자가 찾은 2009년 부산 남항과 부산공동어시장의 풍경으로부터 시작한다. 부산 어시장은 ‘공설시장’과 ‘노천시장’의 두 가지 계열로 정리되는데, 그 역사 또한 일본의 조선침략사로부터 비롯된다. 공설시장 계열인 부산 남항의 부산공동어시장은 1889년 일본 자본인 ‘부산수산’이 남포동에 개설한 ‘부산어시장’을 모태로 한다. 노천 시장 계열은 1925년 부산어시장에 출입하는 조선 생선 상인이 결성한 ‘부산생어조합’의 시장으로부터 기원한다. 공설시장인 ‘부산어시장’은 주로 일본인들을 상대로 고급 어류를 팔았고, 노천시장인 ‘부산생어조합 시장’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값싼 생선을 거래했다. 해방 이후엔 일제 강점기 일본을 비롯해 해외에 나가있던 100만명 넘는 한국인들이 부산의 부두에 내렸고, 생계가 막막한 그들이 밑천 없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공터에 판자를 놓고 생선을 파는 것이었다. 이들이 모여 부산생어조합 시장을 잇는 노천의 자갈치 시장을 형성했다.

그렇다면 자갈치 시장의 명물인 ‘꼼(곰)장어구이’의 재료 먹장어는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을까? 저자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옛 문헌까지 들춰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다. 한국에서는 일제지배로 먹고 살기 어려웠던 1930년대 중후반 부산과 울산 일부 지역에서 서민과 노동자들이 값싼 음식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의 이해와도 맞물렸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물자와 식량이 귀해지자 일본 자원연구소는 먹장어의 가죽과 살코기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먹장어 피혁제품 생산의 기업화가 시도되면서 경남 일대 해안과 일본 니카타현 근해에서 대규모 어획이 이뤄지고, 껍데기를 벗기고 남은 살코기의 식용도 더불어 촉진됐다는 것이 저자의 추론이다. 

함경남도 한겨울의 바다에서 조선 어선이 명태 자망 조업을 하는 광경(왼쪽)과 명태를 건조하던 덕장의 모습. 모두 1930년 발간된 ‘일본지리풍속대계 16 조선 편(상)’에 수록된 사진이다.

명태는 한국에선 민간신앙이나 속담의 소재가 될 정도로 각별하고도 친숙한 식재료이지만 일본에선 원래 먹지 않는 생선이었다. 17~18세기에 본격화된 조선의 명태어획은 원산을 중심으로 함경남북도와 강원도에서 이루어졌다. 19세기에는 고리대금을 겸한 조선의 객주 자본이 지배했으나 1920년대부터 일본 은행의 금융자본이 명태조업에 진출한다. 이와 함께 조선의 주낙, 자망 어획보다 월등한 기관 동력을 쓰고 바닥까지 샅샅히 훑어내는 일본 기선저인망이 명태잡이에 나선다. 일본엔 새로운 돈벌이 원천이었다. 그러니 어획량을 늘이는 데만 열중했다.

하지만 저자는 명태의 젖줄을 끊어놓은 것은 비단 일본의 식민지배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일을 막론한 남획과 남북분단, 기후 온난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일본은 동해바다 밑바닥까지 쓸어냈고, 이에 맞서는 조선 어업이나 어린 명태인 노가리까지 마구 잡았던 해방 후 한국 어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한국이 근대화됐다는 ‘근대화론’이나 이에 맞서는 ‘식민지 수탈론’ 모두를 경계한다. 결국은 둘 다 ‘개발논리’이며, 명태의 고갈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가속화한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식민지성과 근대성의 극복은 ‘개발논리’의 반성으로부터 시작돼야한다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요지다.

식민지성과 근대성에 대한 반성은 한일 어류 연구의 두 개척자이자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정문기(1898~1995)와 우치다 게이타로(1896~1982)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정문기는 도쿄대 농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수산과에서 근무했던 당시의 엘리트 학자였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기업가 시부사와 게이조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어류 연구에 매진했고, 해방 후에도 농림부 수산국장과 부산수산대학교 학장을 역임했다. 1977년에는 정약전의 ‘현산어보’(‘자산어보’)를 현대어로 번역했고, 한반도의 어류를 집대성한 ‘한국어도보’를 완성했다. 어류 연구 공로로 문화훈장과 국민훈장을 받았다. 우치다 게이타로는 도쿄 농학부의 정문기 7년 선배로,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에서 근무하며 일찌기 조선의 어류와 생태를 체계화한 탁월한 업적을 남긴 학자다. 그런데 그는 종전 직전에 일본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자신의 총력을 기울였던 연구 자료를 모두 부산에 두고 다시는 한국땅을 밟지 않았다.

문제는 정문기의 ‘한국어도보’의 상당부분이 우치다 게이타로가 남긴 자료를 표절 내지는 도용했다는 의혹이다. 또 정문기는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 근무 사실을 경력에서 누락했다. 반면, 우치다 게이타로는 이렇다할 고통없이 식민지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내세웠을 뿐 아니라 조선에 두고온 자료를 걱정할지언정 그곳에 사는 사람들, 자신이 직접 도움을 받았던 조선 어민들에 대해선 한번도 숙고하지 않았다. 저자의 근원적인 문제제기는 결국, 아무리 뛰어난 성과라도 일제의 조선 어류 연구란 철저히 식민지 개발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한일 피시로드’ 속의 일본인 저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친근하다. 사람냄새가 난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성찰의 사유는 날카롭고, 통렬하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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