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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거쳐 21세기까지...한반도 ‘삐라’의 역사
한국전쟁기간 미군이 김일성 가짜론을 유포한 삐라.
대북전단보내기국민연합이 최근 북한에 보내고 있는 삐라

[헤럴드경제=신대원 기자] 박물관 안의 유물로 인식되던 ‘삐라’가 다시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

북한이 탈북자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한 대북전단(삐라) 살포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남북이 삐라를 둘러싼 총격전까지 주고받는 사달이 벌어지면서 삐라에 대한 관심도 증폭됐다.

북한은 급기야 삐라를 빌미로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 등 최고위급인사의 인천 방문을 계기로 어렵사리 합의한 남북 2차 고위급접촉마저 무산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1일 성명에서 “우리의 최고존엄을 악랄하게 훼손하는 삐라 살포 망동을 중단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북남 대화도, 북남관계 개선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평통은 특히 ‘위임에 따라 중대입장을 천명한다’고 밝혀 사실상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등 최고지도부의 결정임을 분명히 했다.

통상적으로 삐라라고 하면 80~90년대 북한과 관련된 은밀하고도 수상한 불온문서를 떠올리게 된다.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주변으로부터 삐라를 파출소나 학교로 가져가 신고하고 연필이나 공책을 받은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삐라의 역사는 의외로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적색삐라’와 ‘전국무산계급에게 삐라 5만매 배포’ 등 삐라가 독립운동과 계급운동의 일환으로 인쇄돼 유포됐다는 내용이 심심찮게 언론에 등장하곤 했다.

삐라가 항상 불온한 것만은 아니었다. 박노갑이 1946년 1월 해방정국을 무대로 발표한 단편소설 ‘역사’에서 삐라는 ‘민중의 언로’로 등장한다.

소설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김만오는 삐라에 대해 신문을 보기 어려운 세상에서 정당이나 단체, 개인까지 만들어 배포할 수 있는 ‘고마운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공장이나 작업상의 상태를 폭로하는 삐라가 제작되면서 러시아 노동자의 경제투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강화되었다’는 레닌의 말이 보여주듯 삐라는 태생부터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모든 인적, 물적자원이 총동원된 총력전으로 치러진 한국전쟁에서 삐라는 가장 유용한 심리전 수단으로 적극 활용됐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선전전과 삐라의 강위력함을 먼저 알고 있었던 미국이 보다 적극적이었다.

미군은 프랭크 페이스 미 육군장관의 ‘적을 종이(삐라)로 묻어라’는 지시에 따라 전쟁기간 40억장의 삐라를 뿌렸다. 지구를 열여섯번을 뒤덮을 양이라고 한다.

미군의 삐라는 국제연합이 침략당한 대한민국 지원에 나섰으니 좌절하지 말라는 내용부터 김일성이 사실은 김성주로 소련이 보낸 가짜라는 내용까지 다양했다.

포로들에 대한 심문조사 결과 항복을 고무하거나 항복하도록 결정하는데 삐라가 영향을 미쳤다고 한 비율은 55~65%에 달할만큼 삐라는 위력을 과시했다.

한국전쟁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남북은 삐라를 자신의 체제우위를 선전하는 무기로 적극 활용하며 총성없는 삐라전쟁을 이어갔다.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이 기억하고 있는 북한의 삐라도 이 같은 맥락에서 뿌려진 것이었다.

한 대북전문가는 “삐라는 북한의 전유물도, 남한의 전유물로 아니었다”며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삐라를 매개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북한의 삐라전쟁은 2000년 6·15 정상회담으로 화해국면에 들어서고, 2004년 제2차 장성급회담에서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함으로써 ‘정전’에 들어서게 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역전된 남북한의 경제력이 2000년대 들어 확연하게 벌어지면서 남한으로서는 당국 차원에서 굳이 대북삐라를 살포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과 북한으로서도 정보화가 발달한 남한을 상대로 한 삐라 살포는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 삐라전쟁은 2010년대 들어 탈북자 민간단체들을 중심으로 민간단체에서 대북전단 보내기 운동을 펼치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상 탈북 과정에서 삐라가 큰 힘이 됐다며, 북한의 반발과 남남갈등 우려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차원에서 대북삐라 살포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삐라문제는 제2차 고위급접촉 무산과정이 보여주듯 남북 당국간 현안으로 비화된 상황이다.

북한은 민간단체의 대북삐라가 김 제1위원장과 3대세습 등 최고존엄과 직결된 예민한 문제를 건들고 있다는 점에서 좀처럼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 역시 민간단체의 대북삐라 살포는 국가 최고규범인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에 입각한 행위라는 점에서 쉽사리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다.

한반도에서 삐라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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