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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기와 음악의 고정관념을 깨다…“악기의 경계는 결국 음악의 경계”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피아니스트는 유유히 걸어들어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4분33초, 그는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고 퇴장했다. 악보에는 어떠한 음표도 그려져있지 않았다. 1952년 독일의 현대음악제에 등장한 ‘4분33초’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이후 유럽 음악계를 흔들어놓았다. 이 곡은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의 작품이다. 그는 “고요한 침묵 사이 청중에게 전달된 온갖 잡음과 미세한 소리조차 모두 음악”이라고 했다.

EBS의 음악 다큐멘터리 ‘악기는 무엇으로 사는가’ 3부작은 궁극적으로 ‘음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면 이해가 쉽다. 누구도 음악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침묵의 순간’에 담긴 미세한 소리는 이미 음악이 됐고, 잡음들이 더해 커진 소음도 음악의 경계에 서있다. 음악을 위해 태어난 악기는 어떤 소리까지 만들어낼 수 있고, 그것들이 만든 소리는 어디까지 음악이 될 수 있을까. 


2012년 ‘다큐프라임-음악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를 연출하며 그 해 한국PD연합회 ‘이달의 PD상’을 수상한 백경석 PD의 두 번째 음악다큐멘터리인 ‘악기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백 PD는 “음악이 매개를 통해서 듣는 사람에게 전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이 다큐멘터리는 악기를 해부(1부 악기들의 무덤)하고, 악기 간의 화학작용(2부 악기가 악기를 만났을 때)을 살펴보고, 새로운 악기를 탄생(3부 이것도 악기일까요?)시키는 작업을 진행한다. 제작진의 표현대로하면 악기의 해부학, 사회학, 미래학적인 관점이다. 


첫 번째 편이 될 ‘악기들의 무덤’은 수명을 다한 악기들을 되살리는 작업으로부터 악기의 존재 이유를 따라가본다. 강원도의 한 창고를 ‘악기들의 무덤’으로 설정한 제작진은 국내 최고의 악기장인 6인을 통해 6가지 악기를 살려낸다. 장인들의 손을 거치는 작업과정이 특수촬영을 통해 비쳐지고, 시청자들은 그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악기의 심장 즉 “악기의 소리가 만들어지는 핵심부분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제작진의 설명이다.

두 번째 편에선 악기의 사회학에 집중했다. 혼자서도 빛을 발하지만 여럿이 함께 할 때 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악기들의 만남에 대한 고찰이다. 음악학자인 정경영 한양대 교수가 해설자로 나선 두 번째 편에선 정 교수가 한양대 학생 100여명에게 시험과제를 제시한다. 시험에서 학생들이 내놓은 개개인의 답변은 놀라운 합동연주로 다시 태어나는데, 이는 학생들만 모르는 깜짝 이벤트였다.

백 PD는 “2부의 경우 단 한 번도 다른 텍스트를 참고하지 않고 스토리를 개발해내 의미가 깊다”며 “장기간의 내부 코론을 거쳐 아무도 하지 않은 이야기가 탄생했다. 좋은 앙살블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편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3부인 ‘이것도 악기일까요?’는 융복합 예술가들이 나서 새롭게 태어난 악기들의 탄생과정을 다룬다. ‘악기’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될 3부에선 생소하고 낯선 악기들이 사운드 아티스트 권병준, 건축가 우준승, 작곡가 전유진, 미술가 이은상, 뉴미디어창작가 고훈민 등 분야를 넘나드는 예술가들을 통해 만들어진다.

낯선 직함을 가진 예술가들의 생소한 악기들은 결국 방송 말미 진행될 콘서트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들이 집중한 것은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가 아닌 ‘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악기’였다. 고정관념의 파괴였다. 그 결과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속도에 따라 전혀 다른 소리를 내는 톤휠테이블을 비롯해 빛 센서를 가리면 공기주머니가 부풀어 오르며 소리를 내는 빛이볼, 손가락 센서를 통해 연주하는 에어 피아노 등 총 10가지 악기가 태어났다.

이번 작업에서 톤휠테이블을 만든 전유진 작곡가는 “사운드를 다루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소음을 굉장히 싫어한다”며 “이번 작업을 통해 소음을 다시 듣게 됐다”고 말했다. 전유진 작곡가를 비롯한 다양한 융복합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악기와 때로는 ‘소음’일 수도 있는 악기가 내는 소리에 대한 재해석은 이 다큐멘터리가 궁극적으로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백 PD는 “우리가 쓰는 악기는 이미 수백 수천년의 시간이 됐는데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봤자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전통악기의 가치를 확인하는 재발견의 과정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새로운 악기를 만든다는 것은 음악의 경계를 탐색하는 작업과 유사하다. 악기의 경계를 묻는 것은 음악의 경계를 묻는 것도 같은 질문이다”는 말로 ‘악기란 무엇인가’에 숨은 주제를 전했다.

기획에서 완성까지 1년여의 기간 동안 3억2000만원을 투자해 만든 EBS의 초대형 다큐멘터리 ‘악기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15일부터 17일까지 오후 9시50분에 방영되며, 3부에서 만들어진 악기들의 합주는 10월 9, 1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IG아트홀에서 열리는 권병준 공연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과 24일 부산 LIG아트홀의 이악 공연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에서 만날 수 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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