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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래식음악계의 독재권력‘ 제트족의 지휘자들’을 발가벗기다 ‘거장신화’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우리는 제트족 지휘자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한몫 챙길 생각으로 제트기를 타고 밤새도록 날아다니면서 각기 다른 나라에 있는 세 개의 오케스트라나 오페라하우스에서 일을 하고, 그중 어떤 곳과도 1년에 30회 이상의 연주를 하지 않는 인물들의 시대가 온 것이다. 시차 때문에 충혈된 눈을 하고 야간 비행 중에 자신의 음반 판매 실적을 살펴보는 백만장자 마에스트로를 연주회장이나 녹음 스튜디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빛을 발하며 선 존재.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압도적인 포즈. 천상의 고뇌와 환희를 간직한 듯한 표정. 세상을 지배하는 구원자의 형상. 지휘자의 존재감을 웅변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사진 속 어둠이 묻어버린 것은 과연 무엇일까?

“초기의 카라얀은 그들(나치)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재능 있고 순종적인 음악가였다. 그는 히틀러의 생일 축하 공연, 독일과 오스트리아 병합을 기념하는 특별판 ‘피델리오’, 혐오스러운 음악적 선전물 ‘새로운 전선의 기념’(이 작품의 합창 피날레에는 잔인한 나치 당가와 ‘유대인의 피가 우리의 칼끝에서 뿜어져 나온다’라는 노래가 한데 어우러진다)을 지휘하였다.”

“카라얀 이후의 지휘자가 손가락 끝으로 다양한 세금과 정치적 구조를 조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니키슈 같은 지휘자는 음악적인 연주를 만들어 내는 능력 외에는 거의 없는 네안데르탈인처럼 보일 지경이다.”

영국출신의 세계적인 음악평론가이자 소설가인 노먼 레브레히트는 클래식음악산업이 만들어낸 ‘지휘자’라는, 환상에 가까운 절대권력의 신화를 기원에서부터 추적해 들어가 클래식음악산업의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들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오늘날 클래식음악의 위기를 120년간에 걸친 지휘계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쇠락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노먼 레브레히트의 저작 ‘거장신화’(김재용 옮김, 펜타그램)가 번역 출간됐다. 원저는 지난 1991년 영국에서 초판 발행됐으며, 2001년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작곡가와 분리된 최초의 전문지휘자가 생기기 시작해 어떻게 클래식음악산업을 지배하는 존재가 됐으며, 정치ㆍ경제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클래식음악의 절정과 위기를 가져왔는지 120여년의 음악사를 샅샅히 파헤치는 이 저작은 ‘지휘자로 보는 현대음악사’이자 클래식음악계의 ‘권력의 계보학’이며 ‘음악사회학’이자 ‘정치경제학’이다.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는 야망과 음모, 결탁과 배신, 좌절과 성공의 파노라마같은 드라마를 펼쳐가는데, 추천사를 쓴 음악평론가 장일범의 말대로 “음악계의 흥미진진한 뒷담화”이자 “추리소설보다 재미있는” 논픽션이기도 하다.

책에 따르면 비발디, 바흐, 헨델 등 클래식 음악의 창시자들은 작품을 연주할 때 연주자들과 같이 앉아 바이올린이나 건반악기로 협주곡을 이끌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복잡해진 악보와 방대해진 오케스트라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지 못하는 작곡가들이 생겨났고 특히 청력이 약해진 베토벤은 자신의 곡조차 이끌 수가 없었다.

“자기가 작곡한 음악을 직접 지휘하려는 베토벤의 시도가 눈물 자국 어린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리자, 작곡가는 연주자를 자연스럽게 이끄는 인물로는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지휘자라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그리하여 1865년 한스 폰 뷜로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네 시간 동안 암보로 지휘했고 그에게 지휘권을 넘겼던 바그너는 “내가 의도하는 것의 모든 뉘앙스를 흡수했다”고 격찬했다. 이후 뷜로는 오늘날 지휘자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작곡자와 지휘자의 겸업은 음악이 자본의 활동에 완전히 종속되면서 마침내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서 끝을 맺는다.

그 다음 장은 작곡가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지휘자가 음악계의 지배자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작곡자의 ‘창조’를 대체해 지휘자의 ‘해석’이 음악계를 지배하게 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제 평범한 작곡가는 지휘자의 ‘낙점’을 바라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평범한 작곡가들은 토스카니니의 막강한 힘 앞에서 무력했고, 이들 대부분은 가엾게도 그의 관심에 고마워할 뿐이었다. 라벨은 토스카니니에게 자신의 다음 번 협주곡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게오르그 솔티,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는 위대한 작곡가의 버려졌던 작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신비로운 능력으로 지휘자의 권력을 강화해간다.

음악계의 권력자들은 역사와 정치, 경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인종차별주의, 독재자 히틀러의 문화 정책, 냉전으로 인한 사회주의권의 등장과 몰락 등 격동의 20세기 속에서 음악계의 권력자들의운명은 엇갈렸다. 어떤 지휘자들은 권력에 영합하거나 소극적으로 협력하고, 때로는 저항하거나 외국으로 떠났다. 이는 지휘자 개인의 신변과 지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고생하거나 죽어 간 음악가도 있고 생계의 곤란에 직면한 지휘자도 있었다.

반대로 나치에 협력한 지휘자도 있었다. 카를 뵘,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나치 입당에 그치지 않고 파리에서 나치 당가를 연주하며 히틀러 정권의 문화대사 활동을 한 카라얀, 나치의 문화적 위신을 세워 주고 도덕적 자양분을 공급해 주며 괴벨스에 의해 조종당하는 푸르트벵글러 등 저자는 이들의 기회주의적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에 표현됐던 인류애가 어떻게 희화화되는지 증언한다. 또한 연합군 수배자였던 카라얀이 어떻게 음악적으로 재기에 성공하는지 그 과정을 상세하게 추적한다.

그리고 클래식음악계는 매니지먼트회사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제트족의 지휘자들’의 왕국이 된다.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 여기저기를 다니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지휘자들이 레브레히트가 칭하는 ‘제트족’이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수입을 올리며 람보르기니를 타고 고가의 미술품을 수집하는 음악계의 황제들이다. 지휘자의 역사를 연 니키슈부터 20세기 최고의 마에스트로로 꼽히는 카라얀, 현대의 유명 지휘자들(클라우디오 아바도에서 주빈 메타에 이르기까지)이 모두 ‘제트족’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최후의 권력’이 등장한다. ‘지휘자를 지휘하는 그림자 권력’이라 저자가 칭한 로널드 윌포드다. 그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상 세계 음악계를 지휘하고 있는 인물로 음악가 수백 명과 지휘자 100여 명을 거느린 에이전트 카미(CAMI , Columbia Artists Management Inc.)의 회장이다. 그는 지휘자들을 왕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자 재산도 일궈 주는 인물이고 이들의 가장 개인적인 비밀이나 죄를 감춰 주는 수호자라고 저자는 전한다.

적지 않은 분량의 책 일부는 새로운 실험을 추구하는 지휘자들에 할애했다. 지휘자의 카리스마에 의한 독재적 지배에 반기를 들고 연주자들끼리의 평등한 수평적 관계를 시도했던 소련의 페르심판즈, 뉴욕의 오르페우스, 유럽의 고음악 연주단 등을 소개한다.

또 동성애자, 여성, 흑인 등 클래식계의 비주류 지휘자들의 노력도 아울러 담았다.

한국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인 정명훈에 대한 언급도 눈에 띈다. 정명훈이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총감독 및 상임지휘자를 맡게 된 이유와 해임 과정이 기술돼 있다. 또 저자는 “1950년 이후에 태어난 지휘자 중에서 정상급 자리에 들기 위한 경쟁에 참가한 인물은 다섯 명 뿐”이라며 에사페카 살로넨과 리카르도 샤이, 사이먼 래틀, 발레리 게르기예프 등과 함께 정명훈을 꼽는다. 저자는 이들 다섯명을 “우리에게 알려진 지휘계의 미래”라고 평했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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