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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 숭례문…사실상 ‘서울’ 은 그의 유산
궁 설계부터 4대문이름까지 흔적 곳곳
한때 역적 취급 받았지만 고종때 복권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한 흥선 대원군은 궁을 설계한 정도전의 공로를 인정해 그의 봉작을 회복시켰다. 이어 1870년(고종 7년) 고종은 정도전에게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함께 유종공종(儒宗功宗: 유학의 으뜸이자 나라를 일으킨 공도 최고)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이로써 정도전은 무려 472년 만에 온전히 신원복권됐다.

정도전은 조선의 설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 내내 역적 취급을 받았다. 역적으로 몰리면 가솔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은 물론, 살아남은 후손들은 몸을 숨기며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정도전의 후손들은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내며 영달을 누렸다.

1398년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무인정사(戊寅定社) 당시 정도전을 비롯해 둘째 동생인 정도존, 둘째 아들 정영, 셋째 아들 정유, 막내아들인 정담이 피살당했다. 그러나 지방에 머물러 있었던 맏아들 정진은 다행히 화를 면했다, 이후 태종의 명으로 복권된 정진은 세종 때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정진의 손자 정문형은 성종 때 벼슬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이르렀다. 


당대의 유생들 역시 정도전을 높이 평가하는 의견이 많았다. 1465년 증손 정문형에 의해 중간된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의 서문을 쓴 이는 세조 대의 명신 신숙주였다. 신숙주는 ‘삼봉집’의 후서에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으나 선생에 비교될 만한 이가 없었다”고 평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명군 정조는 1791년 규장각에 명해 ‘삼봉집’을 재편찬하게 했다. 정도전이 당대에 진정 역적으로 평가를 받았다면 이뤄질 수 없는 일들 이었다.

장편소설 ‘혁명’의 김탁환 작가는 “정몽주와 정도전을 모두 죽인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 정몽주만 복권시키는데, 정도전이 조선 말기까지 신원되지 못한 것은 일종의 줄 세우기의 결과물”이라며 “목은 이색의 제자들 중 권근, 하륜 등 절반가량은 조선에 협조했고 이들은 정몽주를 따랐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둘을 모두 복권시키는 일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도전은 비록 조선 왕조 내내 역적이었지만 곳곳에 지워지지 않을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궁궐과 도성문의 이름이다. 정도전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주도하고 직접 도성을 설계했다. 경복궁을 비롯해 흥인지문(興仁之門ㆍ동대문), 돈의문(敦義門ㆍ서대문), 숭례문(崇禮門ㆍ남대문), 숙정문(肅靖門ㆍ북대문)의 이름 모두 정도전의 흔적이다. 도로의 구조를 비롯해 심지어 사대문 안의 지명들까지 정도전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종묘와 사직의 터를 잡은 이도 정도전이다. 사실상 서울 그 자체가 정도전의 유산인 셈이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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