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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광장 - 함영훈> 한국 화단의 편견과 ‘후천적 수채 결핍증’
“서양화는 동양의 그림과 경위가 다른 점이 많고 바탕과 채색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그림인데, 기름기 있는 되다란 채색으로 그리는 이 서양화는….”

1913년 3월 11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보도한 ‘조선에 처음 나는 서양화가의 그림’이라는 기사 중 일부이다. ‘되다랗다’는 ‘풀이나 죽 따위가 물기가 적어 매우 되다’는 뜻이다. 국내 최초 서양화가 고희동의 유화가 우리 예술계에 큰 충격과 함께 선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불과 10년 동안 한국 회화예술 판도는 급변한다.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회화에서 유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전통회화는 주눅 든다. 수채, 수묵화는 그로부터 지금까지도 유화보다는 한 급수 아래로 취급받는다. 과연 종이 위에 그리는 수채-수묵화는 한 수 아래이고, 그래서 값싸며, 서양화란 유화이고, 유화는 고급일까.

아직도 평범한 초중고생들에게 회화 체험은 ‘화선지 위 지필묵’ 또는 ‘종이 위 수채화’가 거의 대부분이다. 미술 전공을 희망하는 학생이라야 유화를 그려볼 기회를 얻는다. 그나마 학습 교보재가 넉넉한 학교에서는 아크릴화를 통해 유화 흉내를 내게 할 뿐이다. 일반적인 공교육을 거친 학생은 유화 그리기 체험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그렇게 ‘수채화’ 시민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술 공교육은 반쪽이거나 연습만 하다 마는 것일까.

두 개 질문의 정답은 모두 “아니다”이다. 가치 있는 수채화는 서양에도 많고, 동양에서도 오래 전부터 화폭 재료로 천을 이용했다. 5~6세기에 그려진 천마도는 자작나무를 여러 겹 붙여 만든 그림판 위에 물이 묻어도 잘 지워지지 않는 물감과 자작나무 기름 성분을 활용해 덧칠해가며 그린 작품이다.

피카소는 개성의 억제를 거부하는 화가이다. 그의 이런 특성은 예술가의 표현능력이 최고로 발휘되는 재료, 즉 종이가 실현시켜 준다. 그의 명품 수채화 ‘까마귀와 여인’(1904)은 뼈만 남은 기다란 손가락을 가진 여인이 까마귀의 머리에 키스하는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투명물감과 파스텔, 목탄 등 천(캔버스)에 쓰기 어렵고 종이에 제격인 재료들은 피카소의 끼를 맘껏 발휘하도록 허용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최근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이라는 전시회에 참석해 한국 화단의 뿌리 깊은 오해에 대해 “유화에 대한 지나친 가치부여에서 나온다”고 꼬집었다. 유 교수는 “전통적으로 화가는 종이와 연필, 붓과 먹으로 출발했고, 종이 위 수채화는 독립된 장르로 예술적 완결성을 보인다”면서 ‘유화 우월주의’라는 편견으로부터 탈피할 것을 호소했다.

유화에 대한 과대평가는 서양문물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던 근현대사와 무관치 않다. 아울러 이를 조장한 화랑, 이에 편승한 작가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우리 화단엔 대중이 친근하게 느끼는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감미로운 파스텔 사랑’이 결핍돼 있다. 화단의 존재 목적이 ‘부잣집 재테크’에만 있는 것이 아닌 이상, 편견을 깨고 개별 장르의 가치를 균형있게 존중하고 평가하는 문화를 우리 화랑들부터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함영훈 라이프스타일부장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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