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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함영훈> ‘비오는 날의 수채화’가 없는 화단
[헤럴드경제=함영훈 라이프스타일 부장] “서양화는 동양의 그림과 경위가 다른 점이 많고 그리는 방법도 같지 아니하며, 또한 그림을 그리는 바탕과 그 쓰는 채색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그림인데...(중략) 기름기 있는 되다란 채색으로 그리는 이 서양화는...(하략)”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불리는 고희동(1886~1965년)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할 무렵인 1913년 3월11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보도한 ‘조선에 처음 나는 서양화가의 그림’이라는 제목의 기사 중 일부이다.

이 기사는 서양화를 ‘천(캔버스)에다 기름(유화물감)을 칠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되다랗다’는 ‘풀이나 죽 따위가 물기가 적어 매우 되다’는 뜻이다. 그때에도 ‘한 번 꽂히면, 무한 열정의 발휘하는’ 한국인의 기질이 발휘되었을까. 고희동의 화폭이 우리 예술계에 큰 충격과 함께 선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불과 10년동안 한국 회화예술 판도는 급변한다.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회화에서 유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전통회화는 주눅이 든다. 수채,수묵화는 그로부터 지금까지도 유화 보다는 한 급수 아래로 취급받는다. 첫번째 질문. 과연 종이위에 그리는 수채-수묵화는 한 수 아래이고, 그래서 값싸며, 서양화는 유화이고, 유화는 고급일까.

근대교육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도 평범한 초중고생들에게 회화 체험은 ‘화선지 위 지필묵’ 또는 ‘종이 위 수채화’가 거의 대부분이다. 특별활동으로 미술을 하거나, 예고 또는 미대 응시자들이라야 유화를 그려볼 기회를 얻는다. 그나마 학습 교보재가 넉넉한 학교에서는 아크릴판 테두리를 테이프로 고정해 화면을 팽팽하게 한 다음 매직으로 윤곽을 잡고,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하는 식의 유화 비슷한 덧칠 흉내를 낼 뿐이다. 일반적인 공교육을 거친 학생은 유화 그리기 체험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채 그렇게 ‘수채화' 시민이 된다. 두 번째 질문. 공교육 현장이 이렇다면, 우리의 미술 공교육은 반쪽이거나 연습만 하다 마는 것일까.

두 개 질문의 정답은 모두 “아니다”이다. 가치있는 수채화는 서양에도 많고, 동양에서도 오래전부터 화폭 재료로 천을 이용했다. 경주 대능원 지구에서 발견된 천마도는 5~6세기 것인데, 자작나무를 여러겹 붙여만든 그림판위에 물이 묻어도 잘 지워지지 않는 물감과 자작나무 기름 성분을 활용해 덧칠해가며 그린 작품이다.

피카소는 개성의 억제를 거부하는 화가이다. 그의 이런 특성은 예술가의 표현능력이 최고조로 발휘되는 재료, 즉 종이가 실현시켜 준다. 그의 명품 수채화 ‘까마귀와 여인’(1904)은 뼈만 남은 길다란 손가락을 가진 여인이 까마귀의 머리에 키스하는 모습을 매우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투명물감과 파스텔, 목탄 등 캔버스에 쓰기 어렵고 종이에 제격인 재료들은 피카소의 혼과 재능을 맘껏 발휘하도록 허용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최근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이라는 전시회에 참석해 한국 화단의 뿌리 깊은 오해에 대해 “유화에 대한 지나친 가치부여에서 나온다”고 했다. 유교수는 “전통적으로 화가는 종이와 연필, 붓과 먹으로 출발했고, 종이위 수채화는 독립된 장르로서 예술적 완결성을 보인다”면서 ‘유화 우월주의’라는 편견으로부터 탈피할 것을 호소했다.

유화에 대한 과대평가는 서양문물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던 근현대사과 무관치 않다. 아울러 이를 조장한 화랑, 이에 편승한 작가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우리 화단엔 대중이 더 친근하게 느끼는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감미로운 파스텔 사랑’이 결핍돼 있다. 화단의 존재 목적이 ‘부잣집 재테크’에만 있는 것이 아닌 이상, 편견을 깨고 개별 장르의 가치를 균형있게 존중하고 평가하는 문화를 우리 화랑들 부터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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