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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쉼표> 브루크너의 휴지
밀도 높은 안개가 수면 위에까지 꽉 차 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 없는 혼돈 속에서 배는 마침내 결심한 듯 몸체를 밀고 간다. 당장 코앞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배는 당당하고 힘차다. 뱃고동소리가 안갯속을 뚫고 묵직하게 울린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은 그렇게 시작한다. 완벽주의자였던 부르크너는 곡을 수없이 뜯어고치는 바람에 원본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9번을 작곡하는 데에 들인 시간만도 10년. 신앙심이 깊었던 브루크너는 9번 교향곡을 신께 바치며, 아픈 심신을 끌고 작품을 끝낼 때까지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끝내 피날레를 완성하지 못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은 지휘자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이다. 저마다의 스타일과 해석에 따라 맛이 딴판이다. ‘브루크네리안’도 취향에 따라 누구의 것을 선호하느냐가 확연히 갈린다. 그럼에도, 공히 명연주로 인정하는 몇몇 타이틀은 있다. 브루크너의 음악적 특징을 템포와 리듬으로 본 귄터 반트의 브루크너는 무뚝뚝하고 거칠며 음을 한장 한장 쌓아가는 건축적인 맛이 일품이다. 줄리니의 빈필 연주는 세련되고 매끈하며, 첼리비다케와 뮌헨필은 느림의 정수를 보여준다.

지난 12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보여준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필의 브루크너는 신을 향한 고딕적인 경건함보다는 땅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가 만들어낸 소리 가운데 압권은 ‘브루크너의 휴지(pause)’였다. 브루크너는 다른 주제로 옮겨갈 때 갑자기 멈췄다 시작하는 진행을 보이는데, 래틀은 이를 그저 멈춤이 아닌 음악의 연장선상에 놓았다. 압도적인 소리의 한순간의 사라짐. 끌림의 흔적이나 끊긴 자리가 느껴지지 않는 사라짐은 당혹스럽다. 빈 소리의 시공을 상상해보라.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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