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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둔의 전각예술가…돌에 우주를 새기다
號까지 고구려몽석 김종순 작가 - 세종대왕의 서사시 월인천강지곡 한글로 세계화
그는 은둔의 전각예술가다. 서울 남산자락 아래 좁은 작업실에서 마치 면벽수도하듯 온갖 돌들을 부여잡고, 새기고 또 새긴다. 국내 미술계에선 아직 이름조차 생소한 작가지만 남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자신만의 새김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잠깐씩 남산을 오르내리는 걸 빼곤 전각에만 몰두하는 작가 고구려몽석 김종순(56)이다.

김종순은 얼마 전 세종대왕의 서사시 ‘월인천강지곡’을 203개의 돌에 새겼다. 4년여의 시간을 온전히 바친 각고의 프로젝트였다. 젊은 시절 공공기관에 근무했던 그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술의 길을 접어둘 수 없어 사십줄에 중국 유학길에 올랐고, 항저우(杭州)의 국립중국미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리곤 오랫동안 수집한 귀한 돌들에 세종이 남긴 대서사시를 새겼다. 이같은 대규모 한글 프로젝트는 국내서 거의 유례가 없는 것이다. 고구려몽석은 왜 한글전각에, 그리고 입체전각에 빠져든 걸까?

▶세종의 ‘월인천강지곡’이 한글 서사시인 것도 몰랐던 내가…=한국인이라면 역사시간에 ‘월인천강지곡’이 세종이 지은 시임을 누구나 배웠을 것이다. 국모인 소헌왕후 타계를 애도하며 아들(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지어올리자, 세종은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며 ‘월인천강지곡’이란 노래(총 500수)를 지었다.

그러나 ‘월인천강지곡’이 한글로 지어진 시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태반이다. 김종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95년 어느 날, 종로의 한 서점에서 ‘월인천강지곡 주해’라는 책을 뒤적이다가 “세종이 남긴 이 아름다운 고어를 누군가는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저자의 머리말을 접했다. 

고구려몽석 김종순(큰 사진) 작가가 전황석 등 명석 203개에 새긴‘ 월인천강지곡’ 전각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그
는 4년간 작업하는 내내 세종의 혜안과 한글의 우수성을 절감했다며 한글이 세계로 더 뻗어나갔으면 한다고 했
다. 아래는 왼쪽부터‘ 월인천강지곡’ 원작의 측면 변관부분, 몽석이 수집한 형형색색의 돌들,‘ 월인천강지곡’탁본
을 두루마리(가로 총70m)로 표구한 것.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작가는 “달빛이 천 개의 강을 비춘다는 제목부터 참 아름답고 서정적이지 않은가? 여기서 ‘천 개의 강’이란 곧 ‘영원’을 뜻하며, 한글이 천년 만년 쓰여지며 겨레의 삶을 풍요롭게 하길 바랐던 세종의 소망이 실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박사 졸업작품으로 이를 택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항저우의 대학기숙사에 틀어박혀 2005년부터 4년여간 쪽잠을 자가며 작업에 매달렸다. 월인천강지곡 3권 중 상권에 실린 시 194편의 핵심단어를 194개 돌의 인문(돌의 ‘얼굴’에 해당되는 바닥면)에 각각 새기고, 변관(측면)에는 194편의 전문(全文)과 새긴 날짜ㆍ장소, 작품번호 등을 새겨넣었다. 때론 자신의 생각과 그림도 곁들였다.

몽석은 “완성작은 시 194수를 새긴 194점과 타이틀, 목차, 맺음말을 새겨넣은 9점 등 총 203점이지만 실제로 새긴 작품은 500여점이 넘는다. 사각의 돌에 시와 해설을 새겨넣는 과정에서 실수로 오자가 나거나, 마음에 안 들어 완성작을 갈아엎은 게 부지기수다. 4년여간 실성한 사람처럼 작업에 매달려 기숙사에서도 유명했다. 나중에 완성작을 본 교수는 ‘어!’라는 탄성만 터뜨릴 뿐 입을 못 다물더라”고 했다. 작품 203점의 탁본을 뜨고, 이를 표구하는 과정 또한 장관이었다. 당시 그의 탁본작품 1점(총 5점의 탁본을 떴다)은 중국서 수천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인사동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아이는…=서울에서 태어나 철도공사장 십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와 충청도서 어린 시절을 보낸 몽석은 붓글씨를 좋아하던 아이였다. 친구들이 TV와 게임에 매달렸을 때 그는 우리 옛 그림책과 서첩을 뒤적였다. 그리곤 종이며 신문지에 써보곤 했다. 조각칼로 나무토막에 그림 새기는 것도 좋아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서울로 되돌아왔을 땐 인사동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교 졸업 후 취직을 한 그는 군대와 직장생활 중 차트작업 등을 도맡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취미인 서예와 전각작업을 계속했다. 몽석이 전각에 심취해가자 잘 알고 지내던 서예가는 고암 정병례 선생에게 그를 데리고 갔다. ‘전각의 현대화’에 힘쓰던 고암을 만나자 몽석은 현대전각에 빠르게 빨려들었다. 선생의 작업실을 1년여간 매일 출입하며 많은 걸 사사했다.

그러나 그는 고암 작업을 모방만 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중국으로 무작정 떠났다. 전각과 서예의 종주국에서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일념에 항저우로 향했고, 예비과정을 포함해 9년여를 머물렀다.

중국에서 몽석은 외국 것, 첨단 유행에만 함몰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월인천강지곡’을 새기게 된 것도 우리 인문학의 뿌리를 되살리고 싶어서였다.

그는 “전각은 단순히 글자를 배치해 칼로 파는 것만이 아니다. 영혼을, 사상을 새기는 것이다. 특히 변관(측면)은 작가의 개성과 철학을 무한대로 담는 공간이다. 그 어떤 예술 못지않게 심오하다. 게다가 돌은 어떠한가. 자연이 남긴 생명체인 돌은 저마다 생김새도 빛깔도 다르다. 오묘한 무늬도 있다. 돌 중에는 금값을 다섯 배 넘는 돌(전황석)도 있다. 이를 살려가며 공간에 심미성을 부여하는 게 전각예술이다”고 했다.

몽석은 중국 체류시절 돌을 수집하며 향수를 달랬다. 고국에 두고온 가족이 그리울 때마다 수집한 돌을 음미했다. 그의 컬렉션 중에는 진귀한 명석이 즐비하다. 그의 원래 호는 ‘몽석’이었다. 그런데 중국 유학 무렵 고구려를 첨가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자 호를 바꿔 작품마다 새겨넣고 있다. 고구려가 한국의 고대역사였음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다.

“한글은 세계 인구 중 7번째로 많은 인구가 쓰는 문자다. 한글작업은 하면 할수록 우수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 뛰어난 한글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전각만큼 좋은 게 없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생활에서 한글전각이 더욱 많이 활용되어야 한다. 디자인에, 상표에, 간판에, 명함에 뛰어난 한글전각이 더 풍부하게 쓰였으면 한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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