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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가정 아닌 마을의 ‘일년지대사’…김장날은 문화공동체 ‘축제의 날’
아름다운 천년의 전통…김장의 인문사회학
아삭한 배추김치에 삶은 돼지고기
향긋한 막걸리 한사발 걸치면
김장 날 고단함은 어느새 저멀리…
품앗이 매개로 이웃과 끈끈한 情 나눠




한반도의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손품을 파는 일이 많아졌다. 서리가 내리는 10월 말에서 11월 초, 밭에서 거둬들인 무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파와 마늘,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을 만들며 긴 겨울을 맞을 채비를 했다. 김장은 각 가정의 ‘일년지대사’였으며, 한 가정의 일이 아니라 마을의 일이었다.

‘식문화’는 역사를 가지고 전해져내려온 ‘문화공동체의 집단지식’이다. 김치와 김장문화는 한민족 고유의 아름다운 문화전통이다. 김치의 제조기법은 한 가정에서 여성을 통해 대를 이어 전승됐고, 김장문화는 마을공동체를 통해 살아 움직이며 이어져왔다. 김치를 담그는 날은 온 마을이 축제였다. 엄마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달래듯 양념에 버무린 김치 한 쪽을 쭉 찢어 입 안에 넣어줬다. 김장을 마치면 아삭한 배추김치에 삶은 돼지고기를 곁들여, 향긋한 막걸리 한 잔으로 그날의 고단함을 달랬다. 울타리로 묶지 않아도 자연히 하나돼 어우러지는 공동체였다.

하지만 이러한 김장문화는 1960~198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의 탈농촌화, 전통적인 마을공동체의 붕괴와 함께 급속하게 사라져갔다. 대가족이 해체돼 핵가족이 되고,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품앗이로 김장을 담그는 일이 줄어들었다. 비닐하우스 등 농업기술의 발달로 사시사철 채소를 구할 수 있게 되면서 김장을 담그는 양이 줄어든 것도 김장문화 쇠퇴의 배경이 됐다.

가족과 가족을 연결하고 마을 전체가 손을 나눴던 ‘김장문화’는 한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결속시켜준 문화축제였다. 빠르게 산업화되고 핵가족화된 오늘날엔 기업과 지자체, 자원봉사단체가 김장문화의 공동체 의미를 되새기며 ‘나눔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에 열린 한국야쿠르트 ‘사랑의 김장나누기’ 행사. [헤럴드경제DB]

김치와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확실시되는 지금에서야 일상민속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 있다. 세계김치연구소는 5일 오전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013 제1회 김치학 심포지엄을 열었다. 국내외 학자들이 참여한 이날 행사에선 김장문화의 역사와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그것의 인문학적 의미를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황경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이날 심포지엄에서 “김장은 한국인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며 “도시화, 서구화, 상업화 시대에도 한국인들이 가정에서 직접 김치를 담그거나 친척들이 정기적으로 제공해주는 김치를 먹고 있다는 점은 김장이 현대사회에서 가족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가족과 가족을 연결하고, 마을 전체가 손을 나눴던 두레와 품앗이가 김장문화 안엔 고스란히 살아나 한국인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준다는 것이다.

김광억 서울대 명예교수도 기조연설을 통해 김장을 한 집안이 계승해야 할 문화전통으로 주목했다. “김장을 담글 때는 대가족적 행사가 되며 참여 여성들 사이에 사회적 위계와 함께 문화적 위계가 실현된다”며 “한 집안을 이루는 가족들이 한곳에 모여 공동작업을 하며 나누어 갖는 것,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공동 작업을 하는 일종의 두레나 품앗이를 하는 것, 혈연적인 집안을 너머 이웃 혹은 친구관계에 의해 품앗이를 하는 것”이 김장문화 담긴 속성이라는 것이다.

사실 김치와 김장문화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만큼이나 다사다난했다. 성속을 오가는 지위가 공존했고,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의 식탁 위를 굳건히 지켰다.

강정원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유교의례문화라는 성스러운 지위를 획득하며 전 신분과 전 문화 영역에서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김치의 지위는 서구 지량의 계몽주의적 공격으로 서서히 낮아졌다”고 했다. 공적의례에서 배제됐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도 김치는 “전 계층의 음식이라는 지위를 상실하지 않고 국민음식으로 재인식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투쟁의 역사로도 풀이했다.

우리 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결속시키는 ‘나눔문화’의 하나인 김장문화는 도시화, 핵가족화된 오늘날엔 이전의 김장문화가 가져다주는 넉넉한 정서는 가까이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전통적인 사회관계에 기반했던 공동체 문화는 빠르게 도시화되고, 핵가족화 비율이 가파르게 높아지며 ‘나눔’의 의미는 차츰 잊혀져갔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하나의 현상으로 해석된다.

지금은 역사 속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학교와 기업이 대체하고 있다. 이웃간의 품앗이로 이뤄졌던 김장문화는 초등학교의 김장실습이라는 공식교육을 통해 이어진다. 음식이 ‘공동체의 지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역시 ‘전승’의 차원이라는 것이 황경순 학예연구사의 해석이다. 재계는 김장철만 되면 바빠진다. 양극화의 그늘에서 시름하는 취약계층을 위한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 끊임없이 김장을 담근다. 지자체와 각종 봉사단체, 종교단체, 인기 스타들도 마찬가지다. 김치 담그는 일에 익숙지 않은 젊은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새로 담근 김치를 가져다주며 그들 사이의 ‘문화적 위계’를 만들어간다. “김장이 농촌에 사는 나이든 시어머니의 실추된 권위를 되살리는 기획이며, 며느리와 딸의 위세 경쟁이 일어나는 장이 되기도 한다. 맛, 솜씨, 무농약 자가 재배농산물이 가족 대 권력구조 및 교환 관계에 개입하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함한희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는 것이 현재의 김장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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