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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함영훈>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장르의 통섭
[함영훈 미래사업본부장] ‘짧고도 아름답게 타다’라는 부제를 가진 1967년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은 귀족 출신의 젊은 장교 식스틴과 서커스단에서 줄타는 소녀 엘비라 사이의 짧고도 열정적인 사랑을 그렸다.

전쟁에 염증을 느껴 탈영한 유부남 장교, 힘든 서커스 생활을 버리고 잠적한 열아홉살 소녀. 인적 드문 야생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사랑에 대해 ‘막장 구도’라고 혹평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 동원된 배경과 기법은 그런 세속적인 논평을 원천봉쇄할 만큼 탁월했다.

영상미는 르느와르의 인상주의를 떠올릴 정도로 따사로운 빛과 대평원의 평화로움을 조화시켰다. 그리고 엘비라와 식스틴의 열정적이지만 고통스런 사랑의 여정은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K.467 2악장 안단테’가 잘 감싸주었다. 두 사람의 짧은 사랑과 동반 자살을 표현한 두 발의 총성은 안온한 클래식 선율속에서 차라리 진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극중 긴박한 상황에서는 비발디의 ‘여름’이 흘렀다. 스토리는 뻔할지 몰라도 영상미와 어우러진 클래식은 엘비라를 그해 칸느영화제 여우주연상에 올린다.


엘비라 마디간은 클래식이 대중문화로 파고든 효시로 평가된다. 영화 ‘러브스토리’(1970년)에서는 제니가 올리버에게 고백할 때 바흐의 브란덴브루크 협주곡 선율이 명랑하면서도 숭고한 이들의 사랑을 지탱해주었다. 이후 ‘지옥의 묵시록’(1979년),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6년), ‘플래툰’(1986년) 등 대중 영화에서 클래식은 비극을 비장하게, 고통을 덜 아프게, 유쾌한 것을 우아하게 표현하는 기재로서 활용됐다.

장르의 통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확대되면서 개별 장르가 갖고 있던 한계를 부수고 문화를 풍요롭게 했다. 보수적인 한국 예술계에서도 장르 파괴의 역사는 30년에 가깝다.


권위의 상징인 영국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81년 거장들의 클래식을 디스코로 바꾼 ‘Hooked on Classics’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한국의 시골 중고생들이 소풍날 이 클래식 디스코에 맞춰 춤을 췄다. 1980년 세계적인 ‘3테너’중 한명인 플래시도 도밍고와 팝가수 존덴버가 ‘Perhaps Love’를 합창한지 9년이 지나자 한국 대표적인 테너 박인수와 대중가수 이동원이 ‘향수’를 함께 불렀다.

1989년 가을엔 패티김이 클래식 분야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세종문화회관에서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공연하면서 단단하던 장벽을 허물더니 7년뒤 클래식계와 대중문화계가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초대형 ‘장르 파괴’형 콘서트를 열었다. 테너 조영남이 일찌감치 대중문화로 갈아타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사이, 김영동, 정태춘, 장사익은 국악과 팝의 접목을 시도했다.

장르의 통섭은 ‘그들만의 예술’로 갇혀있던 클래식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대중문화는 더욱 격조가 높아지는 효과, 즉 ‘문화의 풍요’를 낳았다.


올 가을 드디어 세계 최고권위의 클래식이 강남클럽에 나타난다. 개천절인 10월3일,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연주자들로 구성된 ‘더 필하모닉스’가 서울 강남의 한 클럽에 등장해 클래식 음악과 클럽의 핫뮤직을 접목한 ‘옐로 라운지(Yellow Lounge)‘를 연다는 소식이다.

빈필이 ‘강남 스타일’로 갈아 입는다니…. 올 가을 한국 문화계의 풍요로움이 한가위 보름달 만 하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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