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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광장 - 정용덕> 병렬 기구의 명분
재정 부담 가중되는 병렬기구
집단간 상호견제 위해선 필요
정책조정등 공정한 과정 거쳐
비용 능가하는 효과 창출해야


지난 7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발생한 아시아나기 참사 소식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의구심은 혹시 ‘가외성(redundancy)’의 원리가 작동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 인근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의 랜도 교수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1960년대 말 발전시킨 행정조직 이론이 그것이다. 그가 탄 비행기가 활주로에 막 착륙하려든 차에 방향키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긴급 기내 방송이 나왔단다. “여기서 내 운명이 끝나는구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비행기에 여벌로 장착된 예비장치(backups)를 사용해 무사히 착륙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 후 그는 중첩이나 중복을 낭비로만 간주하던 효율성 위주의 전통 행정이론을 비판했다. 크게 보면 이러한 예비장치를 두는 것이 오히려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중첩되는 기능이나 정부조직은 없애는 것을 정부 개혁의 황금률로 삼아 왔다. 그런데 지난 25년 사이에 이 기본원리에 예외적인 사례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9월 1일자로 창립 25주년을 맞은 헌법재판소가 전형적인 예다.

각 나라의 법치 수준을 비교분석한 미국의 법사회학자 긴스버그는 한국에서 1988년 헌법재판소 설립을 통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크게 신장할 수 있었다고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이 밖에도 국민고충처리위원회(1994년 설립), 국가인권위원회(2001년), 국가청렴위원회(2002년)도 마찬가지로 중복된 기능을 수행하는 병렬 기구다. 그후 국민고충처리위원회와 국가청렴위원회는 행정심판위원회와 더불어 국민권익위원회(2008년)로 통합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년간 줄기차게 ‘고위공직자수사처’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지고 보면 입법부에 신설된 국회예산정책처(2004년)나 국회입법조사처(2007년)도 크게 보면 병렬기구에 해당한다. 이 병렬기구는 모두 다원주의의 원리를 정부 조직화에도 적용한 것이다. 마치 사회 부문 집단 간에 상호 견제가 이루어지듯이 정부기구 간에도 상호 견제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원리다.

미국에서 랜도 교수의 가외성 원리는 특히 재난 및 안전관리 분야에 적극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원자력위원회(1958년 신설ㆍ2011년 원자력진흥위원회로 개명)에 더해 1997년 원자력안전위원회를 별도로 설치한 것이 이 범주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지난 25년 동안 설립되어 온 병렬기구는 주로 법치, 민주주의, 인권, 부패방지 등에 관련된 것이 많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국민의 기존 정부기구에 대한 불신이 1987년 민주주의 이행과 더불어 분출한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법원, 감사원, 검찰, 경찰 등 사정기관이 본연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왔다면 굳이 재정 부담이 가중되는 병렬기구의 설치를 국민이 방관할 리가 없다.

올해는 금융감독원에서 소비자 보호기능을 따로 떼어 ‘금융소비자보호원’을 신설하는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병렬기구의 설립은 재정, 인력 등 행정자원의 중복 비용이 따른다. 여기에 더해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정부기구 간 정책 조정도 문제다. 기존의 정부기구는 주어진 본연의 기능을 공정하고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압축’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국민적 불신을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병렬기구의 신설이 줄을 잇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과도기적 필요성에 의해 불가피하게 신설된 병렬기구의 경우도 내부 전문가 집단의 인맥 형성 등으로 인해 지난번 원자력 부품사고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가외성의 원리는 추가되는 비용을 능가하는 효과성을 창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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