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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책>러셀의 ‘인기 없는 에세이’가 주목받는 이유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 얼마 전 미국의 유머 칼럼니스트인 제인 로터의 자기 부고가 시애틀 타임스에 실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가는 미리 쓴 자기 부고에서 삶을 선물로, 죽음을 영원한 휴가로 표현하며 죽음에 대한 성찰을 보여줬다.

자기 부고의 원조를 따지자면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을 꼽을 만하다. 영국 철학의 계보를 잇는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는 러셀은 1937년 ‘스스로 쓴 부고’에서 자신을 ‘얕은 정신적 깊이’ ‘러셀에게 부족하기로 소문난 통찰력과 정신적 깊이를 소유한 인물’ 등으로 비틀어 표현하며 재치 있는 문체로 90여년에 걸친 스스로의 삶과 공적을 적어내려갔다.

러셀은 이런 식의 반어적 어법을 즐긴 듯하다. 러셀은 그의 황금기라 할 1945~1955년의 한복판인 1950년 ‘인기없는 에세이’(함께읽는책 펴냄)란 책을 냈다. 당시 그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스타 교수였다. 미국에서 강의했던 ‘서양철학사’의 정수만을 뽑아 가르친 ‘서양철학사’ 강의는 그야말로 인기 폭발이었다. 다양한 사례를 곁들인 재치와 도발로 청중을 휘어잡은 그는 대중철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펴내기만 하면 주목받던 시절, 그가 ‘인기없는 에세이’란 제목을 떡하니 붙여낸 것이다.

책은 평소 밝히기를 꺼린 글, ‘철학자들의 은밀한 속셈’(1937), ‘억압받는 자들의 미덕’(1937)을 비롯해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세계에 관해 처음 쓴 글들,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1947) ‘초보자를 위한 철학’(1950), ‘인류의 미래’(1950), ‘현대적 정신에 관하여’(1950),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1946), ‘내가 만든 유명인들’(1950) 등 12편을 담고 있다.


그의 에세이의 맛은 한 마디로 뻥 뚫리는 통쾌함이다.

가령 “나는 정부가 행동에 나서서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있는 헛소리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고 확신한다. 만약 적절한 규모의 군대와 이들에게 평균보다 나은 급여 및 식사를 제공할 권한이 있다면 단언컨대 나는 30년 안에 대다수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허튼 소리도 믿게 할 수 있다. 2더하기 2는 3이라거나, 물은 뜨거워지면 얼어붙고 차가워지면 끓는다거나…”(‘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세상에는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들, 시간에 잠식되지 않은 채 열렬한 관심을 끌어모으는 문제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과학은 적어도 당장은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초보자를 위한 철학’)

“철학자가 단지 사색만으로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는 언어와 언어가 의미하는 대상 사이의 혼돈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세계가 윤리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는 확신이다.”(‘철학자들의 은밀한 속셈’)

“플라톤의 ‘국가론’이 그 정치적 측면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로부터 찬양받았던 것은 아마도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당혹스러운 문학적 속물근성의 사례일 것이다.”(‘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씨앗을 품은 플라톤을 향한 신랄한 비판, 철학과 과학의 낙관주의, 헤겔 철학의 모호성 비판은 농담처럼 보일 정도인데 그 지적과 풍자는 날카롭고 깊다. 


러셀의 90평생은 부침이 심했다. 빅토리아 여왕시대 절정기, 러셀가문의 백작 후계자로 태어난 러셀은 ‘수학의 원리’ ‘수학원리’ ‘지시론’ 등으로 이후 기호학에 영향력을 미친 기념비적인 책을 써냈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운동에 투신, 영국인들의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에는 미국에서 자발적인 망명자 신세로 지내다 영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했으나 조국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소원은 1944년이 돼서야 이뤄졌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러셀은 72세 나이에 서양철학사 강의로 기념비적인 성공을 거둔다.

‘인기없는 에세이’는 그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가치를 고스란히 담아내 무엇보다 러셀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다. 논리적이고 일관성을 지녔으나 천방지축처럼 보이는 평화주의자 러셀이 평생 추구한 진보적 가치와 뜨거움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러셀이 15년 동안 틈틈이 제각각 쓴 글인데도 하나의 코로 엮일 만큼 일관성과 통합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상의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라는 그의 사상의 일관됨을 보여준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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