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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똑같은 물방울은 하나도 없다, 우리 인간이 그러한 것처럼…”
‘ 김창열 화업 50년’展 29일부터 갤러리현대
동양적 세계·서양적 조형언어 접목
점액질 같은 물방울부터
천자문 위에 얹혀진 물방울까지…
절제된 색채로 생성과 소멸 담아

“제주도에 작품 200점 기증한 이유?
예쁜 아가씨들이 많아서지요”


화폭에 영롱하게 매달린 ‘물방울 그림’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원로작가 김창열(84)이 화업(畵業) 50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김 화백은 오는 29일부터 9월 25일까지 서울 사간동의 갤러리현대 본관과 신관에서 작가생활 50년을 되돌아보는 대규모 전시를 연다. 이름하여 ‘김창열 화업 50년’전.

이번 전시에는 지난 1972년 처음 탄생한 이래 40년 넘게 이어져온 물방울 그림 중 대표작들이 나온다. 또 물의 흔적과 번짐효과가 가미되며 보다 서정성을 띤 작품과 천자문과 컬러가 곁들여지며 넓게 확장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 다채롭게 내걸린다. 총 출품작은 40점.

물방울을 모티브로 한국미술을 세계에 널리 알린 김창열은 대중적 인기와 함께 최근 들어 국내외 미술계에서 미학적 논의가 활발하다. 그의 물방울 회화는 동양적 세계를 서양적 조형언어로 접목시킨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질박한 토담빛 화폭 위 노란 천자문에 매달린 물방울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김창열의 2011년 작‘ 회귀’(300x195㎝). 곧 소멸할 물방울이지만 한순간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물방울에서 인간 존재의 숙명이 읽혀진다.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스스로의 생명철학을 절제된 색채와 주제로 표현한 물방울 그림은 극사실 회화이지만 공간의 비움과 채움, 생성과 소멸을 이야기한다. 공간론, 존재론 그리고 절제의 미학을 오롯이 담고 있는 것.

반평생 물방울을 그려온 작가는 “주위에서 어째서 물방울만 그리느냐고 많이 묻는다. 그냥 보면 똑같은 물방울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 다르다. 우리 인간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애쓰는 게 예술이다. 물방울을 그리지만 늘 물방울 이상의 것을 그리려 한다”고 했다.

이어 “물방울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유년시절 강가에서 뛰놀던 티없는 마음에서 왔다고 하고 싶다. 또 청년 시절 6ㆍ25전쟁의 끔찍한 체험도 물방울에 담겨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창열 화백.

결국 인간의 삶과 상처의 원형이 진화해온 형태가 곧 물방울인 셈이다. 대중들에게 물방울 그림이 그 어떤 그림보다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김 화백은 ‘제2의 고향’으로 여기는 제주도에 작품 200점(추정가 150억~200억원)을 기증하기로 하고 지난 5월 협약식을 맺었다. 제주도 측은 제주시 한경면 저지예술인마을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1300㎡ 규모의 김창열미술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특별한 연고도 없는 제주에 작품을 기증한 이유를 묻자 노 화가는 “예쁜 아가씨들이 많아서 그렇다”며 웃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김창열은 제주도로 피란와 1년반을 머물렀다.

작가는 “그때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만났다. 너무나 맑고 예쁜 소녀였는데 마음속으로 좋아만 했지 말 한마디 못 건넸다. 50년째 마음 한켠에 품어왔다”며 “평안남도 맹산 출신이라 고향도 없고, 영혼을 묻을 곳도 없었는데 이제 고향이 생겨 행복하다”고 했다.

자식처럼 귀한 작품을 몽땅 내놓게 돼 섭섭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이제 곧 죽을 텐데요, 뭘”이라며 허허 웃는다.

평남 맹산의 해발 1000m의 산골 출신인 김 화백은 1948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니 중학 동기 120명 중 60명이 죽었다. 그 처절했던 상흔이 물방울 그림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1964년 뉴욕을 거쳐 1969년 맨주먹으로 파리에 정착한 화가는 마구간에서 물방울 그림을 처음 그렸다.

당시 경제적으로 몹시 궁핍했던 작가는 새 캔버스를 살 돈이 모자라 캔버스를 재활용해가며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인생을 바꿔놓을 체험을 했다. 캔버스에 달라붙은 물감이 쉽게 떨어지도록 뿌려놓았던 물이, 이튿날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던 것. ‘물방울들이 너무나 숭고했다’는 그는 이후 점액질 같은 물방울에서부터 곧 흘러내릴 듯한 맑은 물방울, 화폭을 뒤덮는 올오버식 물방울, 천자문 위에 얹혀진 물방울 등을 잇달아 탄생시키며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잠시 후면 곧 소멸될 물방울이지만 더없이 찬란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대단히 사실적이지만 초현실적인 그림이다. 모든 것을 공(空)의 세계로 직조한 그림에선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작가의 소망이 오롯이 담겨 있다. 따라서 물방울 그림은 치유의 그림인 것이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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