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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먼다큐>영혼을 울리는 ‘국민 성악가’ 박인수의 삶과 음악
“클래식이나 대중음악이나 스타일만 다르지 똑같은 음악이에요. 클래식은 좀 오래 가고 대중음악은 짧다는 차이가 있지만, 절대적으로 동등하죠. 본질은 둘 다 즐거움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클래식이 애초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상실하고 권위주의에 빠져 계몽하고 가르치려 들면서 대중들로부터 멀어졌어요. 클래식이 외면받는 데에는 클래식 음악가들의 책임이 커요.”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국민 성악가’ 테너 박인수(75). 7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도 당당한 현역으로 학생을 가르치며 국내외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 대중들이 성악에 쉽게 접근해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소리를 찾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권위주의에 빠져 대중의 외면을 받는 성악계의 성찰을 주문하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

데뷔 51년이 된 그의 삶은 참된 음악과 소리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고전음악과 대중음악, 서양음악과 한국음악, 오페라와 판소리의 경계와 영역을 넘나드는 파괴와 창조의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수 이동원과 함께 국민가요 ‘향수’를 불러 클래식과 대중음악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풍부한 성량을 가진 그의 소리엔 삶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다. 환희가 넘치는 듯하면서도 짙은 우수가 깔려 가슴을 적신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우면산 끝자락에 자리잡은 백석대 음대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엔 바닥에서 정상까지 올라본 사람만이 갖는 무게와 기품이 묻어났다.

영혼을 울리는 성악가’ ‘국민 테너’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박인수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겸 음악대학원장이 서울 서초구 방배동 우면산 끝자락에 자리잡은 백석대에서 자신의 50년 음악 인생을 회고하고 있다. 박 교수는 가난과 절망, 고통, 업앤다운(Up & Down)을 넘게 해준 것은 노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고 말한다.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마도로스를 꿈꾸던 ‘쌈질’ 청년=먼저 성악가 박인수의 젊은 시절이 궁금했다. 그는 1938년생이다. 1950년 한국전쟁과 1960년 4ㆍ19 혁명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동기에 10대와 20대 초반을 보냈다. 혼란하고 가난했던 시절,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어렸을 때 꿈이요? 없었어요. 쌈질하고 그랬으니까. 장례식이나 결혼식에서 옛날 동네친구나 후배들을 만나면 ‘형이 진짜 음악 교수 맞아?’ 하고 물을 정도죠. 그 때 내 모습을 봤던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못믿는 거야. 그때는 깡패였지, 허허허.”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나 미아리와 정릉에서 자란 그의 청년기는 넘치는 혈기에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쌈질’을 하던 철부지였다. 어려서 기관지가 약해 감기에 잘 걸리고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동중학교에 입학해선 럭비부에 들어가고 기계체도도 했다. 경동고에서는 수영부장을 하고, 유도에 보디빌딩까지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그때 결성한 것이 ‘미아리 5형제파’였고, 그가 두목이었다. 손가락 피를 막걸리에 섞어 마시며 삼국지 도원결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몰려다니며 쌈질을 하고 정릉유원지 수영장에 여자를 데리고 오는 남학생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13살 때 6.25 전쟁이 터졌는데, 전우파 기질이라는 게 있었어요. 전쟁과 혼란의 와중에 사람들이 죽는 걸 보면서 ‘힘이 없으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거지요. 힘에 대한 숭상이 생긴 거예요. 우리도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그렇게 살았지.”

고교를 졸업하면 부산으로 내려가 마도로스가 되어 배를 타고 대양을 누비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소설을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에 조금씩 눈을 떴다. 특히 그에게는 타고난 목소리가 있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심금을 울리는, 하늘이 내린 목소리였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도 교회를 나간 것은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영화와 같은 인생의 전환은 거기서 시작됐다. 고교 2학년 말 당시 배제고 교목이던 김창일 목사가 부흥회 도중 박인수의 노래를 듣고는 “너는 성악을 해야 한다”면서 꿇어앉게 하고 안수기도까지 했다. 신앙심도 약한 상태에서 당시는 뭐가 뭔지 어리둥절했지만 성악을 공부했던 김 목사로부터 발성법을 배우고, 시간이 지나면서 질풍노도와 같던 마음도 슬슬 바뀌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후 낮에는 서울 중구청에서 임시직으로 근무하고 저녁에는 성균관대 사학과를 다니면서 당시 이화예고(현 서울예고) 이우근 선생으로부터 3개월 동안 무료로 정식 레슨을 받았다. 청년 박인수가 성악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가난·힘겨움을 달랜 성악가의 꿈=박인수는 이듬해인 1960년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했다. 실기로 뽑았기 때문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다. 발성법의 차이로 처음엔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지만, 지도교수를 바꾸고 스스로 소리를 가다듬으면서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드디어 1962년 로베르트 슈만의 ‘시인의 사랑’ 전곡으로 독창회를 열면서 성악가로 정식 데뷔했다.

하지만 성악가의 길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음악, 특히 성악으로 먹고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학 3학년까지 다닌 다음 군 복무를 마치고 음악가 집안 출신의 안희복과 만나 1965년 11월 결혼을 했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했다.

“아내가 서울시립교향악단 단원으로 발탁돼 그 월급을 갖고 살았죠. 하지만 남자 자존심이 있는데 수입이 하나도 없으니,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래서 봉천동 고개에서 간장 대리점도 하고, 광릉에서 양송이 재배도 하고, 친구 도움으로 리어카를 장만해 신촌과 명동에서 포장마차도 했어요. 결혼 후 2년 정도 그렇게 살았는데, 엉망이었죠. 장사하고는 맞지 않았어요.”

고난은 어깨동무를 하며 온다고 했던가. 1967년 국립오페라단 ‘마탄의 사수’에서 주인공 막스역을 맡았지만, “완전히 망한 공연”이 돼버렸다. “완벽하게 하려다가 최악의 공연이 됐고, 7개 일간지가 혹평을 쏟아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죠.”

그럴수록 노래에 대한 욕구가 불타올랐다. 장사를 하면서도 노래만 생각했다. 노래가 생각나면 새벽에도 노래를 불러 전세집을 11번이나 옮겨야 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의 싹이 텄다.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은인인 중학교 동창 우준형을 만났다. 포장마차 밑천을 대주었던 친구였다. 그는 “너에겐 장사가 맞지 않다. 돈을 대줄테니 노래를 하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오페라를 하나 올리려면 당시 돈으로 300만원이 필요했어요. 지금 돈으로 4억~5억 정도 되는 거금인데 그 친구의 도움으로 ‘라보엠’을 만들었지. 1969년도였는데, 대성공을 했어요. 내가 이대 오페라 무대에 몇 번 출연한 적이 있는데, 이대 앞 파리다방에서만 800장이 나갔지. 나중에 계산을 해 보니 수익이 320만원이었는데, 진짜 성공은 그 돈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라보엠’의 성공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를 계기로 공연계의 출연 요청이 쇄도했고, KBS 방송에도 출연했다. 한 선배가 방송사의 녹음 테이프를 미국으로 가져가 버펄로의 오페라 교수에게 들려주었는데, 그 실력에 깜짝 놀라 미국 출연요청을 한 것이었다. 1970년 5월 초청가수로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그의 노래 인생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소리를 알아본 대가와의 만남=인생의 황금기에 대한 질문에 박인수는 “1969년 ‘라보엠’ 공연이 성공해 미국으로 간 다음, 귀국하기 전인 1978년까지 미국과 캐나다 남미 등에서 수백편의 오페라와 공연에 출연해 박수갈채를 받았을 때”라고 대답했다.

그는 유학이 아니라 오페라 주역으로 초청받아 미국으로 갔지만, 뉴욕주립대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줄리아드 음대 마리아 칼라스의 오디션에서 8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통과해 유급 계약직으로 무대에 섰다. 이후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급받고 1년에 2회 오페라에 출연한다는 조건으로 맨해튼 음대로 옮겨 최고의 성악가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아내도 미국으로 와 맨해튼 99번가의 작은 아파트에 살림집을 마련했지만, 학교 지원금만으론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사하던 날 마지막 남은 10달러로 이사를 도와준 친구들에게 핫도그 하나씩 사서 나누어 주고 자신과 아내는 굶은 것이 뉴욕 생활의 첫 출발이었다. 웨이터 보조도 하고 뉴욕에 진출한 한국 기업 직원들에게 곰탕을 배달하면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했다.

하지만 노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모든 어려움을 잊게 해 주었다. 칭찬과 격려는 더 없이 큰 힘이었다. 줄리아드의 조르주 토치 교수는 “세상에는 목소리 좋은 사람이 모래알처럼 많지만 박인수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나는 그걸 하트라고 보는데, 영혼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너에게 있다”고 격려해주기도 했다. 1972년 브루클린 오페라 극장의 ‘피델리오’에서 프로레스탄 역을 맡았을 땐 뉴욕타임스가 “박인수는 훌륭한 음질과 영웅적인 폭을 가진 테너”라고 극찬해 최고 성악가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맨해튼 음대를 졸업하고 1976년부터 본격적인 공연활동에 들어갔다. 1년에 반 이상은 미국 전역과 남미, 캐나다 등지로 공연을 다녔다. 최고의 시간이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공연은 1978년 콜롬비아 국립오페라극장의 오페라 페스티벌이었다. 전 세계에서 유명한 42명의 솔리스트가 참여했는데 동양인으로선 그와 일본인 1명뿐이었고, 박인수가 오프닝으로 ‘라보엠’을 불렀다.

“노래를 마치자 박수치고 환호하면서 야단이 났어요. 다음 공연을 위해 지휘자가 연주를 시작해도 박수가 그치지 않는 거예요. 10분에서 15분은 된 것 같았어요. 전국에 생방송을 했는데, 다음날 TV에서 봤다면서 택시비도 안 받고, 식당에 들어가니 ‘브라보!’ 하면서 박수를 치고... 기분이 엄청 좋았죠. 내가 가진 허영심이 박수갈채였는데, 대만족을 했던 거지요.”



▶편협한 클래식을 넘어 얻은 자유=그는 14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1983년 한국으로 금의환향,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서는 후학 양성과 공연에 매진했다. 1년에 200회 정도 공연을 하고, 학생을 지도했다. 잘 나가던 그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1989년의 ‘향수’ 파문이었다. 가수 이동원이 정지용의 시 ‘향수’를 갖고 와 함께 취입을 하자고 제안해왔다. 시도 좋고, 작곡의 대가인 김희갑 씨가 곡을 써 기대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몇 개월 후 곡을 보고 한 번에 녹음을 끝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 헤설피 금빛/게을은 울음을 토해내는 곳/그곳이 차마/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향수’야말로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한국 최고의 서정시가 아니던가. 여기에 곡을 붙인 노래는 대중가요로 보기엔 음악성이 너무 풍부하고, 다른 가곡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곡이다.

당시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하거나 이걸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없었지만, ‘향수’는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12월까지 70만장 정도가 팔려 7억원 정도의 수익이 났다. 연말에 이동원이 찾아와 자신의 빚을 갚고 집을 구하는 데 돈을 썼다면서 달랑 훈제 연어 한 마리를 놓고 갔다. 박인수는 그게 향수 인세의 전부였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그런데 ‘향수’는 엉뚱한 파문을 몰고 왔다. 성악계에서 ‘클래식을 모독했다’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는 국립오페라단의 차기 단장으로 내정돼 있었으나, 제명 논의까지 일었다. 스스로 오페라단을 나왔다. “클래식을 모독하는 건 대중가수와 함께 노래하는 게 아니라 클래식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하고 팬 속으로 들어갔다. 국민은 박인수의 편이었다.

“원래 클래식은 대중음악이었어요. 헨델의 수상음악은 뱃놀이 음악이었죠. 성악가는 고용인이었고, 노예인 경우도 있었어요. 베토벤 시대부터 독립적인 음악가로 대접받기 시작했죠. 그러다 성악가가 훌륭한 존재처럼 인식되면서 권위주의가 생긴 거예요. 그 권위주의가 한국의 클래식 음악을 퇴보시켰어요. 그 역사를 알면 그렇게 거만을 떨 수가 없죠. 역사를 알아야 해요.”

풍부한 성량에다 심금을 울리는 클래식의 서정적인 가사는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절반씩 구성한 KBS ‘열린음악회’ 출범의 산파역할을 했고, 거기서 노래를 불렀다. 성악계와 거리를 두니 자유와 인기가 찾아왔다. 반전이 이뤄졌다.



▶득음을 위한 구도자의 길=테너 박인수는 2003년 서울대를 정년 퇴직하고 2004년부터 백석대 석좌교수로 지금도 학생을 가르치면서 공연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데뷔 50주년 콘서트를 열었고, 매년 국내외에서 50~60회의 공연을 한다. 그는 음악은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즐거움이 감흥을 일으키고, 감동을 주어 성악가를 존경하고 권위가 생길 수 있지만, 권위주의는 나쁘다는 생각이다. “성악가는 매개체이자 엔터테이너일 뿐이며, 관객이 존경한다고 해서 자신이 위대하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음악은 음악가가 아니라 듣는 사람 위주가 돼야 한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는 음악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사건으로 1992년 한 직업훈련원에서의 공연을 들었다. 당시 뉴키즈언더블럭의 내한 공연 사고로 사망자가 나오자 정부에서 학생들에게 클래식을 가르쳐야 한다며 성악가들을 각급 학교로 보냈을 때의 일이었다.

“한번은 진주의 직업훈련원에 배정을 받았어요. 기술을 배우는 원생들이 클래식에 무감각할 것이라고 걱정했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열광하는 거예요. 그 때 음악은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감성으로 듣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단히 철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듣고 좋아하는 것이 진짜 음악이란 얘기죠.”

그는 아직도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소리를 연구하고 적용하고 있다. 민요와 가요의 영역을 넘나들며 판소리 창법까지 자신의 발성에 접목시켰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성악기법인 벨칸토 창법의 보급에 힘을 쏟고 있다.

“옛날에는 TV 가수였는데, 지금은 언더그라운드 가수예요. 100% 초청으로 노래하는 거죠. 아직 들을만하니까 초청하는 거예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할 거예요. 한 때 소리가 잘 안나와 ‘너도 이제 한물 갔다’고 얘기하던 친구들이 요즘에는 ‘팔십까지는 하겠다’고 얘기해요. 벨칸토와 판소리 창법 덕분이죠. 대중들은 ‘회춘했다, 다시 돌아왔다’ 하고 말해요. 허허허.”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이제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풍모를 풍기는 박인수. 그의 삶은 얼핏 순탄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를 만든 것은 절반은 천부적 재질이며, 절반은 실패와 절망, 고난이었다. 그는 그것을 ‘업앤다운(Up & Down)’이라고 표현했다. 업앤다운을 넘어 한단계 높은 업앤다운으로 넘어가게 만든 것이 꿈이요, 희망이었다. 그의 희망가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이해준 문화부장/hjlee@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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