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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마도 돈을 생각했다면 이런 그림..” 원석연의 ‘맑은 침묵의 화면’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아마도 돈을 생각했다면 이런 그림을 안 그렸을 것이다. 명성을 생각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원석연(1922~2003) 화백은 그랬다. 그는 육십평생 연필그림을 고집했다. 연필의 재료적 한계를 극복한 그는 고집스럽게 연필화라는 장르를 모색했다. 하나의 작은 터럭 하나의 티끌조차 소홀히하지 않고 전체의 생동을 담았다. 더구나 그는 연필로 시대정신을 오롯이 드러냈다. 단색의 연필화이지만 그 어떤 채색화 못지않게 풍부한 세계를 창출한 것이다. 그의 10주기를 맞아 잊혔던 작가가 다시 태어난다.


▶”연필 선에는 음이 있고, 색이 있다. 그리고 고독도..”=원석연은 연필오채론을 펼쳤다. 생전에 그는 “연필의 선에는 음(音)이 있다. 저음, 고음이 다 있다. 연필선에는 색도 있다. 그 색은 따사로운가 하면, 슬프고, 고독하기도 하다. 그리고 생명이 존재한다”.

동료들 사이에 ‘괴벽이’ ‘대꽂이’로 불렸던 원석연 화가. 그는 흰 종이에 연필로 개미 한마리를 그려놓곤 같은 크기의 유화작품과 동일한 값이 아니면 안팔았고, 꼬박 며칠동안 그린 초상화를 고객이 수정해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찢어버린 성정의 소유자다. 연필화가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자 깊은 단절과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간 이 괴짜 작가의 10주기를 맞아 그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오는 20일부터 서울 통의동 갤러리아트사이드(대표 이동재)에서 개막된다.


고(故) 원석연 화백은 한낱 보조적 도구쯤으로 여겨져온 연필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질감과 양감을 자유자재로 표현했다. 연필 한자루면 못할 게 없었다. 그가 연필화를 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작가들은 “연필을 굴리는게 신기와 같았다. 연필로 온갖 빛깔을 다냈다”고 혀를 내둘렀다. 미술평론가 오광수 씨는 “그의 연필화를 보고 한동안 그 충격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황해도 신천 출신인 그는 아홉살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을 보고 작가에의 길을 다짐했다. 그리곤 15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敎)를 마쳤다. 그는 “누가 뭐래도 나는 연필 하나로 하나의 완성된 회화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그는 한국전쟁과 피난을 겪으며 언제, 어디서나 작업이 가능한 연필화야말로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세계임을 간파했다.

그러나 연필화를 그저 학습용 실기나 습작쯤으로 치부하는 한국 화단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삽화와 컷을 그릴 법도 했지만 오로지 연필화가 본격적인 장르로 자리매김하는데 혼신을 쏟은 것도 그 때문이다.


▶삶의 진솔한 지점에 애정을..명성 안겨준 개미그림= 원석연에게 2B연필(4B연필은 너무 무르고, 값도 비싸 2B를 썼다)은 대상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을 넘어, 현대적인 표현의 세계, 나아가 깊은 철학의 세계로 이끄는 도구였다. 뛰어난 데생능력과 남다른 구성력, 진지함에서 발현된 조형세계는 연필이 지닌 다양한 색감과 표현의 극점을 보여준다.


표현하기 쉽지않은 대상을 연필만으로 더도 덜도 없이 똑부러지게 형상화한 작품은 그가 대상을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갖고 관찰했는지, 또 대상에서 느낀 정신적 감흥까지 담으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낡은 가위나 도끼, 부엌칼 같은 투박한 기물을 그린 그림에선 기물을 사용했던 민초들의 고단했던 삶의 체취마저 전해진다.

원 화백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서울과 부산에서 네 차례나 개인전을 가졌다. 이중섭과 교유한 것도 이 때로, 현실세계의 냉혹함을 뱀, 개미, 병아리, 닭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원석연의 이름 석자가 미술계와 대중에 확실히 각인된 것은 ‘개미’ 연작 이후다. 실물 크기로 정밀하게 그려진 수백, 수천 마리의 개미가 떼지어 움직이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불러일으켰다. 탱크의 바퀴자국이 깊게 파인 길엔 누군가의 고무신 한 짝이 나뒹굴고, 다리와 몸통이 짓이겨진 개미떼는 전쟁의 참혹함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원석연은 미국의 볼티모어, 로체스터 등에서 개인전을 열며 갈채를 받았다. 



1970년대에는 접으로 묶인 마늘, 두릅에 엮인 굴비, 도마 위 토막 난 생선, 깨진 달걀, 담배 등을 그리며 연필묘사의 가능성을 저 극한까지 밀고 나갔다. 단촐하다못해 너무나 초라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도 그렸다. 대통령은 그의 전시회를 찾아 작품을 매입하기도 했다.


세밀함과 덧없음이 공존하던 원석연의 그림은 생의 후반기에 이르자 표현은 절제되고, 여백은 더 많이 생기며 서정성이 고양됐다. 지평선을 극단적으로 낮게 둠으로써 시야 저 너머로 펼쳐지는 대지의 광활함을 강조한 그림, 연필의 다양한 톤을 활용해 철물의 녹슨 질감까지 촉각적으로 느끼게 한 그림은 오늘 다시 봐도 현대적이다.

미술사가 김경연 씨는 “수없는 자기 성찰과 관조를 통해 얻어진 ‘맑은 침묵의 화면’은 원석연이 도달한 회화적 성취”라고 평했다.


10주기 작품전에 맞춰 원 화백의 연필화 중 정물, 풍경, 인물, 동물, 개미 연작 등 145점을 추려 묶은 화집 ‘원석연’도 열화당(대표 이기웅)에서 출간됐다. 이번 화집에는 원 화백의 30대 초반 작품에서부터 세상을 떠난 해인 2003년까지 50년간 그린 연필화 중 대표작과 국선 입선작 ‘얼굴’ 등이 실렸다. 또 미술평론가 유준상, 이경성, 이구열, 윤범모, 오광수, 홍경한, 부산 공간화랑 대표 신옥진, 겸재정선기념관장 이석우 등이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표했던 평문과 회고문, 원석연의 작가노트,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도 수록됐다.


일평생 “연필만큼 정확하고 솔직한 재료는 없다”고 되뇌며 작고 미미한 개미에서부터 격동기 한국인과 함께 했던 도구, 그들의 삶, 그리고 한국의 자연을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도 치열하게 담았던 원석연의 연필화는 이제 한국미술계의 중요한 자산이자, 사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시는 7월 28일까지. (02)725-1020 사진제공=아트사이드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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