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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톰블리, 리히터, 클라인…거장 작품을 통해 ‘쓰기예술’ 을 다시 본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아, 예쁜 편지지에 한자한자 정성을 기울여가며 손글씨를 써본 게 대체 언제던가. 글씨가 마음에 안들어 밤을 하얗게 새우며 쓰고 또 썼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모든 서신이 e메일로 대체된 데다, SNS가 창궐하면서 손글씨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강의 필기조차 노트북에 하고, 연하장도 ‘카톡’으로 받으니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는 구시대 유물이나 진배없다.

‘서화일치(書畵一致)’의 도도한 전통은 역사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컴퓨터 자판이 손글씨를 대신한 이 디지털시대에 손글씨의 가치를 되묻는 이색 전시가 개막됐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은 개관 25주년을 맞아 서예박물관에서 ‘그리기와 쓰기의 접점에서’전을 마련했다. ‘그리기’와 ‘쓰기’의 원천을 탐구하고, 쓰기예술의 미래를 조망한 이 현대미술전에는 한 중 일 3국 작가는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의 추상거장들이 망라됐다. 또 한국에선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아랍문화권 작가들의 작품도 모였다.


이처럼 다양한 권역의 작가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소재한 리튼아트파운데이션의 전폭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독(韓獨)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특별전에 리튼재단은 주요 소장품 68점을 대여했다. 여기에 예술의전당 전시팀이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익갤러리, 갤러리2, 서울옥션 등에 작품대여를 요청해 11점을 추가했다. 제약기업 베링거의 크리스찬 베링거 회장 등의 주도로 지난 201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범한 리튼재단은 손글씨의 문화적, 교육적 가치에 주목하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 수준 높은 컬렉션을 통해 쓰기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 재단은 지난해 독일 비스바덴미술관에서 유럽과 북미, 아시아, 아랍을 아우르는 컬렉션 중 100인의 작품으로 전시를 꾸며 쓰기와 그리기, 서예와 미술의 관계를 조명했다. 비교문화학적 접근을 보여준 이 전시에 이어 리튼재단은 한국에서 두번째의 본격적인 전시를 갖게 된 셈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 작가들의 면면은 자못 화려하다. 현존하는 작가 중 최고 영향력을 지닌 작가로 꼽히는 독일의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비롯해 프란츠 클라인(미국), 안토니 타피에스(스페인), 사이 톰블리(미국), 윌렘 드 쿠닝(미국) 등 서구 거장들이 망라됐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겐 생소한 아랍권 작가들과 한국 중국 일본 작가 등 총 59명의 작품 79점이 내걸렸다. 출품작들은 현대미술 속에 여전히 꿈틀대며 살아있는 칼리그래프(서예)의 미학과 정신을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은근하게 보여준다.

전시는 ‘몸과 기호’ ‘그려진 문자들’ ‘모방과 창조’ ‘상상의 문자-풍경’ ‘상상의 문자-텍스트’ 등 5개 소주제로 짜여졌다. 첫 섹션인 ‘몸과 기호’에는 수묵으로 사람 ‘인(人)’자를 계속 써내려가 거대한 탑을 만든 서세옥의 작품 ‘인간’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칼 오토 괴츠의 ‘아르콘’과 모하메드 에사의 ‘봄의 제전’이 내걸렸다. 또 언어 이전의 원초적인 표현과 소통의 에너지를 격렬하게 담은 드 쿠닝과 리히터의 작품도 이 섹션에 출품됐다. 


‘상상의 문자-풍경’에는 자연을 추상으로 형상화한 이우환의 1985년작 ‘동풍’과 사이 톰블리의 1985년작 ‘룩소르-겨울여행’이 나란히 이웃해 작품들이 대화를 나누는 형국이다. 이강소의 작품 ‘강에서’(리튼재단 소장품) 또한 사이 톰블리의 ‘무제’와 짝을 이루며 동서양 필획에 뿌리를 둔 현대추상의 개성충만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밖에도 이번 전시에는 한스 아르퉁, 조르쥬 마티외, 아돌프 고틀립, 마크 토비 등 추상미술의 거장과 유세프 아마드, 라시드 코라키, 시린 네샤트 등 아랍 문화권 작가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또 이노우에 유이치, 가즈오 사라가 같은 일본 대가들과 중국 현대 서예가들의 작품, 이응로 남관 김창열 이정웅 손동현 등 우리 작가들의 작품도 출품됐다. 


예술의전당 김애령 전시감독은 “서양에서 캘리그래피는 공예의 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기수련과 정신성에 기반을 둔 동양서예에 매료된 조르주 마티외, 마크 토비 등 일군의 작가들이 이를 탐구하면서 전후(戰後) 추상회화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즉 서양작가들의 먹글씨 모방은 동양의 고차원적 예술에 대한 경의였으며 이후 새로운 조형언어를 창출하는 방편이 됐다는 것. 이후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쓰기예술’을 기반으로 상상의 문자를 발명하거나, 내면의 독백을 낙서처럼 끄적이고, 화폭을 한장의 편지나 책장처럼 만들며 읽을 순 없으나 그 필치와 구성으로 작가의 심상을 다채롭게 표현해내고 있다.

작가이면서 리튼재단 고문역도 맡고 있는 앙드레 크나이브(프랑스)는 “디지털시대일수록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인문학적 측면에서, 또 두뇌의 발달을 촉진하고 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중요하다. 쓰기예술은 오늘날 많은 작가들에게 창작의 매우 중요한 원천이다”고 했다. 전시는 5월 5일까지. 일반 5000원. 02-580-1300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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