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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아트 30주년 특별전 ‘나의 벗, 나의 애장품’ …이인희·유홍준 · 구정모 등 미술애호가 50여명 70여점 소장 작품 소개
오랜 세월 애호가들의 곁을 지켜온 미술품들이 모처럼 나들이를 했다. 30년 전 서울 인사동 한쪽의 작은 화랑으로 출발해 한국을 대표하는 화랑으로 성장한 가나아트가 30주년을 맞아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나의 벗, 나의 애장품’전을 꾸몄다. 이 특별전에는 오랫동안 한국 미술계를 꾸준히 지지해온 50여명의 컬렉터들이 꼽은 ‘내 생애 최고의 애장품’ 70여점이 출품됐다. 작품들은 고미술에서부터 근현대, 해외 미술품에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장르도 회화, 사진, 판화, 도자기, 토우, 목기 등이 망라됐다.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준 작품, 스토리도 흥미진진=‘미술애호가’를 자처하는 컬렉터 중에는 기업인을 필두로 화가, 교수, 의사 등이 두루 포진해 있다. 이들은 이번에 오랜 세월 벗하며 즐기던 애장품을 일제히 공개했다. 또 작품 소장에 깃든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애호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미술가의 예술혼이 담긴 작품을 지근거리에서 즐기는 것이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를.

이번 전시에 조선백자 달항아리의 맑은 기운을 담아낸 도상봉(1902~77)의 그림을 내놓은 배동만 제일기획 전 고문은 “도상봉 화백의 ‘백자항아리’를 곁에 두고 수십년째 음미 중인데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저 빈 항아리 속에 무엇이 있을까’ 끝없이 상상하게 된다. 언젠가 목돈이 필요해 그림을 내놓았는데 그 그림이 없으면 너무 삭막할 것 같아 곧바로 거둬들였다”고 했다. 배 고문은 또 “미술관과 화랑에 그림 보러 가는 즐거움이 생긴 뒤론 다른 취미활동을 접게 됐다. 아내가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오래전부터 갖고 싶어해 물색해오다 얼마 전 작은 인물화를 장만했다. 그 행복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젊은 시절부터 미술을 좋아하고, 한솔제지를 맡은 뒤로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종이 작업을 꾸준히 수집해온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아깝게 요절한 한국미술 1세대 화가 김경(1922~65)의 유화 ‘쌍계’를 출품했다. 6ㆍ25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척박한 시기의 우리 겨레의 모습을 질박하게 압축해낸 작품이기에 특별히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이 고문은 헨리 무어의 조각 ‘여인상’도 내놓았다.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 또한 미술계에선 알아주는 애호가다. 미술대학의 졸업작품전도 직접 찾아다닐 정도로 애착이 남다르다. 서울 여의도 일신방직 사옥 전면에 설치된 스타치올리의 활처럼 구부러진 조각은 김 회장의 진취적인 CEO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전시에는 화가 고영훈(61)의 초기작을 내놓았다. 김 회장은 40년 전 홍익대 졸업 전시에서 눈여겨봤던 고영훈이 화실을 마련할 돈이 없어 애를 태우자 대작을 사주며 작가를 후원했다. 그 후 고영훈은 ‘월드 스타’로 성장했는데, 될성부른 작가를 일찌감치 알아본 김 회장의 혜안에 고개가 숙여진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또한 알아주는 미술애호가다. 작가 장욱진, 김종학, 오수환 등과 교유해온 그는 화가 오수환(67)의 작업실에 들렀다가 손에 넣게 된 법정 스님의 휘호를 출품했다. 선미(禪味)가 물씬 풍기는 묵적이다.

또 구정모 대구백화점 회장은 한국적인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쾌대의 ‘부인도’를, 김용원 도서출판 삶과꿈 대표는 단원 김홍도의 ‘선상관매도’를,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은 근원 김용준의 ‘문방부귀도’를 내놓았다.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은 토마스 스트루스의 사진을, 이상준 호텔프리마 대표는 천경자의 인물화를 출품했다. 


▶‘돈 경쟁’보다 치열했던‘안목 경쟁’=목기ㆍ골동품 수집가인 화가 김종학이 내놓은 애장품은 좀 별나다. 그는 나무로 만든 쌀 탈곡기를 출품했다. 김 화백은 “낡은 탈곡기가 그 어떤 조각보다도 조형성이 뛰어나 소장하게 됐다. 형태 면에서 앤서니 카로(영국)의 조각이 연상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40년 넘게 수집한 조선목기들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차 기증한 바 있다.

부산 출신 기업인인 신성수 고려산업 회장은 1980년대 초 미술잡지 ‘계간미술’의 표지를 장식했던 최욱경(1940~85)의 대작 연필화 ‘마사 그래함’을 출품했다. 그는 잡지에 실린 최욱경의 추상화에 매료돼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결국 작가 사후에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는 “작가가 연필과 목탄 수백개를 써가며 혼신을 다했던 작품으로, 유족을 여러 차례 찾아가 설득한 끝에 수집했다. 1989년 호암갤러리의 ‘최욱경 회고전’ 때도 전시됐던 대표작이다. 언제 봐도 감동적”이라고 했다. 신 회장 또한 현대미술, 고미술을 가리지 않고 즐기는 애호가로 유명하다.

지난해 서울 부암동 ‘석파정’(옛 대원군 별장)에 서울미술관을 개관한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은 이중섭(1916~56)의 ‘싸우는 소’를 내놓았다. 그는 “제약회사 영업사원 시절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명동의 한 액자집 처마 밑에 서 있다가 이중섭의 ‘황소’를 보게 됐다. “수십년간 발품 팔며 모은 작품으로 마침내 미술관까지 차렸고, 이제 미술 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전 문화재청장)의 미술 사랑 또한 각별하다. 이번에는 오동나무로 된 문갑과 연적, 그에 어울리는 자하 신위(1769~1845)의 시화(詩畵)를 출품했다. 유 교수는 “미술애호가들이 이런 전시를 열면 누가 가장 고가의 작품을 내놓을까 경쟁할 거라 생각하지만 ‘누구 안목이 가장 빼어난가’가 최고 관심사다. 돈 경쟁이 아니라 안목 경쟁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밝혔다.

미술품을 소장하는 일은 다년간 작품을 감상하며 터득한 안목과 부지런히 쫓는 발품, 특별한 인연이 있어야 가능하다. 컬렉터들의 남다른 취향과 심미안에 따라, 작품과의 특별한 인연에 따라 소장된 개개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관객 또한 어느새 ‘미술의 매혹’에 빠져들게 된다.

이옥경 가나아트갤러리 대표는 “미술계가 투기 논란 등 부정적인 시선을 받아온 탓에 소장가들이 다소 망설였다. 그러나 투명한 미술 시장 풍토가 마련돼야 한다고 설득해 전시가 성사됐다. 많은 사람이 그 궤적을 음미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오는 4월 14일까지.(02)720-1020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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